수원화성의 시설 중 가장 멋진 것을 꼽으라고 하면 누구든지 공심돈을 가장 먼저 생각할 것이다. 당시에는 수평적인 건물이 많았는데 그와 달리 공심돈은 높아서 어디에서든지 볼 수 있어 랜드마크 역할을 하였다. 특히 서북공심돈 입면은 다른 공심돈에 비해 더 세장(細長)하여 멋있었다. 남공심돈의 입면은 하부 치성(雉城)과 분절되어 높이감은 없고, 한 칸의 작은 평면은 팔달문과 대비되어 웅장함보다는 소박한 느낌이 앞선다. 동북공심돈은 성곽 내부에 위치하여 치성과 연결되지 않고 평면이 커서 수직적인 맛보다는 오히려 수평적인 면이 보인다. 서북공심돈이 세장하게 보이는 것은 공심돈과 하부 치성이 일치되어 외관상 한 몸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서북공심돈의 위치는 화서문의 동측으로 화서문의 보호와 그 주변을 방어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높이 제도는 치성과 공심돈을 하나로 만든 일체형으로 높이는 치성 15척과 공심돈 18척이고 상부에 와가(瓦家) 높이까지 더하면 총 40자(12.32m)가 된다. 내부 공간은 3층이며 수직동선은 동북공심돈의 계단이 아닌 남공심돈과 같은 사다리가 설치되었다. 주공격 무기인 불랑기포(佛朗機砲)를 발사할 수 있게 층별로 20개의 포혈(砲穴)을 뚫었다.
세 개의 공심돈은 한 번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시간 차이를 두고 만들어졌다. 게다가 세 개 공심돈은 각기 크기와 형태도 달랐는데, 경제적인 공사를 추구한 화성공사가 왜 이렇게 비효율적인 방법으로 공사를 하였을까? 준공 시점을 보면 남공심돈은 1795년 10월에 만들어졌고, 서북공심돈과 동북공심돈은 각기 다음 해 3월과 7월에 만들어진다. 남공심돈을 기준으로 하면 서북공심돈은 4배가 되고 동북공심돈은 16배가 된다. 또 평면은 남공심돈은 4면 모두 각(角)이 졌고 서북공심돈은 성의 내부 쪽 2면만 각이 졌고 동북공심돈은 4면이 모두 타원으로 만들어졌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크기는 점차 커지고 형태는 원형으로 변해간다.
크기의 변화에서 남공심돈의 면적은 1.3평으로 포와 총을 쏘고 뜨거워진 무기를 교체하는 것이 어려워 이를 개선하고자 서북공심돈의 면적을 4.14평으로 크게 한다. 형태의 변화에서 벽돌로 만들어진 외벽은 화공에는 강하지만, 높아서 포탄의 공격에는 쉽게 무너지는 단점이 있었다. 방어면에서는 각진 형태보다 원형이 포탄의 공격에 강하기에 사면이 모두 각진 남공심돈을 개선하여 서북공심돈은 외부 두 모퉁이를 원형으로 하였다.
공심돈은 설치방법 상 공심돈(空心墩)과 공심적대(空心敵臺)로 구분한다. 동북공심돈은 성곽 내부에 홀로 있어 순수 공심돈이고 서북공심돈과 남공심돈은 치성 위에 있어 적대(敵臺, 성곽보다 높은 치성)로 분류되어 공심적대가 된다. 공심적대 2개 중 전투력은 당연히 나중에 만들어진 서북공심돈이 남공심돈 보다 강하다. 물론 제일 나중에 만들어 군인의 동선을 개선한 동북공심돈이 세 개 공심돈 중 가장 뛰어난 시설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서북공심돈은 공심돈 중 전투력이 가장 뛰어나지는 않지만, 외형적으로 가장 아름다워 공심돈 자체를 싫어(조선왕조실록 정조 21년 8월 18일)한 정조도 서북공심돈만은 신하들에게 자랑(정조 21년 1월 29일)하였다. 서북공심돈 위에서 보면 숙지산과 대유돈(大有屯)과 만석거(萬石渠)을 넘어 광교산이 펼쳐져 아름답게 보였다. 그래서인지 별칭으로 악양루(岳陽樓)라 하는데 이는 중국 강남의 3대 누각 중 하나로 여기서 보는 풍경이 매우 뛰어나기 때문에 붙었다고 본다.
아름다운 서북공심돈은 정조 사후에도 굳건히 자리를 지켜왔고 한국전쟁의 풍파도 잘 견디고 원형을 잘 간직하여 2011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정조가 신하들에게 자랑했던 것처럼 지금 수원시민들도 가장 사랑하는 시설이 바로 서북공심돈이다. 그리하여 1999년에는 수원시를 상징하는 심벌마크로 제정되어 현재까지도 수원시를 빛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