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촉한 제갈량의 북벌을 막아낸 위나라 중신인 사마의 손자 사마염이 건국한 왕조 서진(西晉)의 위항(衛恒)이 쓴 ‘사체서세(四體書勢)’에서 동한(東漢)의 서예가 장지(張芝)의 서예를 논할 때 나오는 구절이 있으니, ‘臨池學書(임지학서)/ 池水盡黑(지수진흑)- 연못에 가서 붓글씨를 연습하니/ 연못의 물이 온통 까맣게 되었다’
‘사체서세’는 중국 최초의 서예 이론서로서 문자 변천의 역사와 여러 가지 서예의 이론을 상세히 논하고 있는 귀중한 문헌이다. 장지는 붓글씨를 연습하기 위해 집에 있는 모든 옷감은 먼저 붓글씨를 연습한 뒤에 빨았다고 하며 쉼 없이 연못에 가서 종일토록 글씨를 연습하여 연못의 물이 온통 검은색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특히 초서에 뛰어나서 초성(草聖)이라 불리었다.
동진(東晉)의 왕희지(王羲之) 또한 장지의 경지를 따라잡기 위해 붓글씨를 하도 열심히 연습하는 바람에 나중에는 연못의 물이 완전히 먹물 색이 되고 말았다고 하는 일화도 있다.
당송팔대가의 한 사람인 북송의 증공(曾鞏)은 왕희지의 고사와 관련이 있는 임천(臨川)의 연못을 방문하여 ‘묵지기(墨池記)’라는 명문장을 남겼다고 한다. 글 속에서 증공은 왕희지가 만년에 이르러서야 서예의 완숙한 경지에 도달한 것을 상기시키면서 그가 뛰어난 명필이 된 과정에는 타고난 재능보다는 후천적인 노력이 더 큰 역할을 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고사로 인하여 지금도 서예를 배우는 것을 ‘임지’라고 부른다고 한다.
추사에게는 불행하였던 제주의 유배, 하지만 변방 섬나라에서 추사체를 완성하였고, 지방 더구나 한양과는 천리길이었던 섬의 유생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쳤으며 제주지역의 학문 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된 계기였다.
서예의 완성을 위하여 연못에 가서 붓글씨를 연습하여 연못의 물을 온통 검게 물들이고 일가를 이룬 동한의 서예가 장지처럼, 불세출의 명필 왕희지처럼, 벼루 10개를 갈아 구멍이 나도록 닳게 하고, 천 자루의 붓을 다 닳게 한, 추사의 의지와 노력처럼, 인고의 세월을 견디며 공을 들이지 않고는 서도이든, 학문이든 자기 완성이 쉽지 않음이다.
※추사가 힘겨운 유배 생활을 하던 1844년에 사제간의 의리를 잊지 않고 북경에서 두 번이나 귀한 책을 구해 보내준 제자인 이상적(李尙迪)의 인품을 칭송하여 답례로 그려준 그림이 세한도이다. 세한은 추운 겨울이란 의미고, 그림에서는 추운 겨울이 되어야 잣나무와 소나무가 시들이 않는다는 것을 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세한도를 받은 이상적이 이 그림을 중국인들에게도 보여주어 종이를 덧붙여 발문을 계속 달게됨으로 14m에 달하는 길이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