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가와 깊은 연(緣)을 가진 꽃이 연(蓮)꽃이다.
불교를 설명 하면서 연꽃을 배제하면, 음식에 소금이 들어가지 않은것처럼 믹믹하다.
부처님께서 마야부인의 옆구리로 세상에 태어나시어 일곱 발자국씩 걸을 때마다 룸비니 동산에 연꽃이 피어올라 떠받들었다고 하며 부처님을 모신 사찰의 천정, 벽화, 문살, 탑, 기와 등 거의 모든 곳에 연꽃 문양이 새겨져있다. 부처나 보살이 앉은 자리가 연화좌(蓮花座)이고 스님네가 입는 가사(袈裟)를 연화복(蓮花服), 연화의(蓮花衣)라고 부른다.
부처님이 오신 날이면 어둠을 밝히는 연등을 단다. 연꽃은 곧 불심이며 불심은 연꽃으로 상징된다. 화엄경에서는 연꽃을 향(香), 결(潔), 청(淸), 정(淨)의 네 가지 덕으로 말하고 있다.
이 말이 아니더라도, 예로부터 연꽃의 고결함과 아름다움을 예찬한 글은 수 없이 많지만 그 중에 함부로 탐하지 않는 처염상정(處染常淨), 그 자체가 불교적이다. 연뿌리는 질펀한 늪 바닥에처해 있어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맑은 본성을 간직하여 세상을 정화한다는 것이다. 중생들이 몸은 비록 어지러운 사바에 있어도, 정(淨)하게 지녀 세상을 구제해야 한다는 불교의 깊은 뜻이 담겨 있는것이다. 많은 꽃이 수면 위에 떠 있었도 연꽃잎에, 잎사귀에 흙탕물 한 점 없다. 쟁반 같은 뽀송한 연잎은 물방울을 동그랗게 말아 고이 간직하고 있다가, 한 점도 취함이 없이 그대로 떨어뜨린다.
연꽃은 그 존재만으로도 주변을 신성하게 한다. 연지 주변을 돌면서 꽃과 석련자(石蓮子)를 보면 꽃은 금방 진 것 같은데, 씨를 품은 씨주머니가 오롯이 달려 있다. 연꽃은 꽃을 피우면서 동시에 씨를 품는다고 한다. 꽃과 씨가 동시에 탄생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를 모든 결과는 이미 원인을 품고 있음을 비유한다고도 하고, 중생은 태어남과 동시에 불성을 지니게됨을 상징 하는 것이다. 연꽃은 아무리 만개하여도 결코 요염하지도 않다. 향도 자극이 없어 있는 듯, 없는 듯하다. 그러나 그 향기는 멀어질수록 그윽하기만하다.
연꽃의 표정과 향은 온화하며, 깊고, 진중하다. 그래서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화중군자(花中君者)이다.
菊花之隱逸者也 / 牡丹花之富貴者也 / 蓮花之君子者也(국화는 꽃 중의 숨은 선비요 / 모란은 꽃 중의 부귀한 꽃이며 / 연은 꽃 중의 군자니라)
송나라 성리학자 염계 (濂溪) 주돈이(周敦) 이렇게 연꽃을 두고 ‘애련설(愛蓮說)’이라는 글을 지었는데, 연꽃의 속성과 특징을 워낙 잘 묘사해 후세 문인들이 다시 연꽃을 두고 글을 지을 수 없게 만들었다고 한다.
‘연(蓮)’이라는 식물은 어느 한 부분도 버릴 것 없이 유용하게 쓰이는데 열매인 연밥과 뿌리는 식용과 약용으로 쓰이며 연잎은 차를 끓여 먹기도 하고 연잎밥의 재료로도 쓰인다. 연 줄기는 말려서 반찬으로 쓰기도 한다.
퇴계(退溪)는 만년에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서당 동쪽에 네모난 조그만 못을 만들어 연꽃을 심고 ‘정우당(淨友塘)’이라 이름했는데, ‘정우’란 ‘깨끗한 벗’이란 뜻으로 곧 연을 가리킨 말이다.
이러하니 화중군자(花中君者), 연(蓮)은 제이름 값을 독특히 한다.
해가 중천을 지나면 하루의 노고를 연지(蓮池)에 부리고 정하게 꽃잎을 오므리면 연대 밑으로는 개구리밥과 생이가 방석처럼 깔고 앉아있다. 연지불국(蓮池佛國)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