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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도긴 개긴

 

이탈리아 여행에서 조심해야 할 것은? 멋지고 친절한 남자? 몇 배의 바가지? 아니, 아니. 가장 조심할 것은 첫째도 소매치기, 둘째도 소매치기, 셋째도 소매치기다.

오전 9시 로마 테르미니역. 카스트로 프레토리오역에서 B라인 전철을 타고 테르미니역에서 A라인으로 환승했다. 나처럼 바티칸 박물관을 가려는 사람들이 몰려서 역이 혼잡했다. 박물관 예약을 12시로 했지만 성 베드로 성당도 가야하기에 일찍 서둘렀다. 하지만 어디를 가든 관광객 천지였다. 하필 배낭여행의 마지막 도시가 극성수기에 다다른 로마였다.

전동차 안은 서울의 출퇴근 전철보다 더 비좁았다. 에어컨이 가동되긴 하는 것 같은데 워낙 사람이 많아서 더웠다. 서로 맨살이 닿지 않으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종합선물 세트처럼 다양한 인종을 꾹꾹 눌러 담은 전동차가 출입문을 서서히 닫기 시작했다.

그 때였다. 닫히는 전동차 문을 온몸을 던지듯 들어온 두 여자가 있었다. 숨도 쉴 수 없을 만큼 비좁은 틈을 용케 뚫은 여자가 나를 스쳐 중앙으로 들어섰다. 숄을 어깨에 두른 그녀의 겨드랑이 밑이 내 팔을 스쳤다. 그 느낌은 ‘미끄덩’ 하고 살갗에 와 닿았다. 그 더운 날 숄까지 두르다니.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연이어 나머지 여자도 내 옆으로 들어섰고 나는 그 두 여자 사이에 끼게 됐다.

그런데 좀 이상했다. 무언가 가방을 건드리는 느낌이 들었지만 아무 이상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 다음 역인 레푸블리카역에 도착했다. 그때 내 옆의 두 여자가 사람들을 헤치고 급하게 다시 나가는 것이었다. 기가 막혔다. 다음 역에 내릴 사람들이 굳이 사람들을 밀치고 왜 안으로 파고 들었는가 말이다.

두 여자는 미끄러지듯 빠르게 내려 인파속에 묻혔다. 전동차가 움직이고 그 다음 역에 사람들을 토해 놓을 때가 되서야 무릎을 쳤다. 나는 왜 항상 바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일이 끝난 후에야 깨닫는지. 그렇다고 중간에 내릴 수도 없었다.

목적지인 바티카니 역에 내려서 가장 먼저 한 일은 가방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크로스 가방을 열었다. 여권, 유레일패스, 돈, 휴대폰이 얌전히 잘 있었다. 현금도 적잖게 지니고 있던 터여서 어찌나 조바심이 났는지 모른다. 두근거리던 가슴이 그제야 진정됐다. 내 가방을 목표로 했던 그들은 뜻을 이루지 못했던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옷핀으로 단단히 꽂아놓은 덕에 소매치기를 당하지 않았다. 몇 개의 옷핀이 내 가방을 꽉 물고 잘 지켜주었다.

그러나 기차 안에서 패널티를 물었던 것은 배낭여행의 오점으로 남았다. 피렌체에서 로마로 가는 기차였고 유레일패스로 가는 마지막 일정이었다. 유레일패스는 첫날과 마지막 여행일이 매우 중요하다. 그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소매치기만 걱정한 나머지 유레일패스에 날짜 쓰는 것을 잊었다.

유레일패스 아래의 여정목록에는 그날의 날짜를 썼지만 위쪽의 여행 마지막 날짜는 미처 쓰지 못한 것이었다. 바로 앞에서 볼펜으로 날짜를 쓴다고 하는데도 금발의 키 큰 여자승무원은 단호한 표정이었다. 속일 의도도 없었고 이미 아래 목록에 여행 날짜를 써놓았음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트랜 이탈리아의 규칙 앞에 꼼짝없이 벌금을 물을 수밖에 없었다. 두 눈 멀쩡히 뜨고 말이다.

차라리 소매치기를 당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적어도 한여름에 숄을 두른 귀여운 그들의 하루가 행복하지 않았을까싶다. 이제 이탈리아 여행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상대를 묻는다면 소매치기가 아니라 이탈리아 기차라고 말을 바꿔야겠다.

도긴 개긴. 결국 좀도둑한테 비공식적으로 털리거나 큰 도둑한테 공식적으로 뜯기거나 매 한가지다. 하긴, 내 삶에 그게 그것인 것이 이 하나만 있을까. 앞으로 남고 뒤로 밑지는 것이 비단 이번 뿐은 아니었으리라. 그렇더라도 조금 밑지며 산다한들 좀 어떤가. 산다는 게 늘 남기만 하겠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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