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ㆍ인물ㆍ장소ㆍ사실 네 가지는 기록의 요소이다. 네 가지가 구비되면 기록이 완전하고 구비되지 않으면 기록이 불완전하여 사실을 바르게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가 있다. 장소 불비(不備)로 인하여 기록이 불완전하게 되어 사실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게 되는 경우에 강역(彊域) 문제가 일어난다"
남당(南堂) 박창화(朴昌和.1889-1962)라는 사람이 「강역개론」(彊域槪論)이라는 저술에서 역사를 구성하는 요소로 네 가지를 들면서, 왜 역사에서 강역 문제가 중요한지를 역설한 대목이다.
남당은 강역과 강역학(彊域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규정한다.
"신라지역은 어데이며 백제지역은 어데이냐 하는 큰 문제로부터, 부여는 어데이냐, 와산성(蝸山城)은 어데이냐 하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역사에 관련되는 지리 일반을 강역이라 명명한다. 따라서 강역을 연구하는 학문을 강역학이라 한다"
도무지 구한말에 태어나 정식 역사학 교육을 받지 않은 소위 '재야사학자'가 한 말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학술적이다.
동시대 역사학자, 예컨대 단재 신채호(1880-1936)나 육당 최남선(1890-1957), 위당 정인보(1892-1950), 두계 이병도(1896-1989)의 역사학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그럼에도 한국 역사학계에서 남당 박창화라는 이름은 까마득히 매몰된 존재였다. 그가 조명받기 시작한 것은 1989년을 넘어서지 못한다. 부산에서 그가 필사했다는 문제의 「화랑세기」가 출현하고 난 뒤였다.
남당은 수 십 책에 달하는 각종 저술을 남겼는데 이 중에 「화랑세기」 필사본 두 종류가 끼여 있었다. 이것이 공개되자 역사학계는 격렬한 논쟁에 휘말렸다.
한쪽에서는 역사학에 조예가 깊었던 박창화라는 사람이 뛰어난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해 만들어낸 소설적 창작품이라고 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1300년 전 신라 사람 김대문(金大問)이 쓴 바로 그 「화랑세기」라고 했다.
박창화의 필적으로 된 「화랑세기」가 이런 논쟁에 휘말리면서, 박창화라는 인물과 그의 역사학은 거의 조명받지 못했다.
「화랑세기」 가짜론은 「화랑세기」가 가짜이니 박창화의 다른 저술은 볼 것도 없다는 식으로 내쳤고, 진본론도 박창화의 다른 저술이 모두 가짜이고 오직 「화랑세기」만이 진본이라고 주장하는 사태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그러다가 지난해에는 1927-28년 일본에서 발간된 유명 역사학잡지인 「중앙사단」(中央史壇)에 박창화가 기고한 역사 논문 3편이 발굴, 소개되면서 비로소 '역사학자 박창화'가 조명되기 시작했다.
이런 와중에 남당이 남긴 저술을 소장하고 있는 그의 손자 박인규(朴仁圭. 청주 거주)씨가 남당의 역사학 논저 중에서도 우리 나라의 강역 문제를 집중적으로 탐구한 5편을 묶어 「우리나라 강역고(彊域考」(민속원)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여기에는 「강역고」(疆域考)ㆍ「강역개론」(疆域槪論)ㆍ「강역문답」(疆域問答)ㆍ「요동론」(遼東論)ㆍ「평양변」(平壤辨) 등 5편이 수록돼 있다.
여기서 남당은 강렬한 민족주의를 드러낸다. 예컨대 기자조선은 중국 역사서와 사대주의에 물든 조선 지식인들이 억지로 만들어낸 것이라고 하는가 하면, 윤관의 9성은 함경도 일대가 아니라 두만강 북쪽 연해주 주변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이런 주장들 가운데 지금 보아 황당한 대목도 없지 않으나, 사실 이런 점에서는 신채호나 이병도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따라서 지난해 그의 역사학 논문 3편 발굴에 이어 이번에 그의 강역 관련 글 5편이 공개된 것은 「화랑세기」 논쟁을 넘어 '역사학자'로서의 남당 박창화를 조명하는 기폭제가 될 전망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