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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정조의 건축]창룡문(蒼龍門)

 

 

 

성역 의궤에 의하면 창룡문은 “용인, 광주로 영남까지 통하는 길이며 문밖에는 나무가 많아 민가는 없다.”라고 묘사하고 있는데 지금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현재는 도로가 북쪽으로 뚫려 이문을 이용하는 사람은 관광객을 제외하고는 얼마 되지 않는다. 그리고 창룡문 밖은 또 하나의 도심이 있어 그때와는 다른 모습이다.

일반적으로 창룡문에 대해 수원화성의 동문(東門)으로 풍수지리상 좌청룡이며 방위 때문에 사신(四神) 중 동쪽을 의미하는 용(龍)의 이름을 붙였다고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사신을 정할 때는 주체자를 기준으로 방위를 정하는 것이 원칙이다. 즉, 화성의 주체인 행궁을 중심으로 보면 창룡문은 정면에 위치하여 남쪽이 된다. 그러므로 사신사상(四神思想)에 의해 수호신을 이름에 사용하려면 용이 아닌 주작(朱雀)이 들어가야 한다. 정조가 청룡문 대신 창룡문이라고 한 것은 동쪽의 방위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홍재전서(弘齋全書)에서는 ‘창룡문은 그 형상에서 취한 것’이고 ‘화서문은 그 방향을 분별한 것’이라 기록하고 있다. 창룡문의 이름은 방위와 관계가 없고 자리한 땅의 형상에서 나온 뜻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창룡문이 있는 산의 형상을 하늘에서 보면 마치 용(龍)이 용연(龍淵)에서 남수문(南水門)까지 꿈틀거리는 모습에서 그 뜻이 유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정조는 유난히 용을 좋아하였는데 아마도 본인 태어날 때 태몽으로 아버지 사도세자가 용꿈을 꾸고 비단에 용을 그려 벽에 걸어두었다는 것과 관계가 있어 보인다. 팔달산 기슭에 읍치를 만들고 생각하지 않은 용을 용연에서 만나게 된다. 용의 머리에는 뿔처럼 생긴 용두정(방화수류정)을 만들어주고, 몸에는 창룡문이란 이름을 선물한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창룡문의 위치는 수원화성의 중심에서 보면 동쪽이라기보다는 북동쪽이고 오히려 봉돈(烽墩, 봉수대)이 행궁(行宮)의 정동향(正東向)에 있다. 수원화성을 처음 계획한 정약용은 동문을 현재 봉돈의 위치인 행궁의 정동향에 놓았다. 이는 화성부 성조도(華城府 城操圖, 1795년 2월 12일 훈련을 위한 그림)에서 확인된다. 성조도는 공사가 완성된 부분과 미완성 부분을 구분하여 표시하고 있으며, 동성과 동문은 공사가 안 된 부분으로 표기되어 있다. 창룡문 공사는 을묘년 행차(1795년 윤이월)가 끝난 후인 5월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그해 10월 17일 준공 된다. 창룡문 위치변경 시점은 여러 가지를 고려하면 1795년 3월~5월 사이로 생각된다.

현재 항공사진을 보면 동일포루와 동일치 사이에 성벽이 안으로 욱은 특이한 형태를 볼 수 있다. 동성(東城)의 배치는 남동으로 이어지는데 이곳만 유독 정동향을 하고 있어 어쩌면 창룡문의 내정지일 가능성이 있다. 창룡문이 현재 위치로 재조정된 이유는 용인과 광주로 가는 통행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조치로 보인다.

창룡문이란 별칭은 장안문, 팔달문과 같이 을묘년 행차(1795년 윤이월) 직전에 함께 만들어졌다고 생각했으나 그러지 않았다. 공사 시작을 알리는 고유제는 1795년 5월 8일 조운상(趙雲祥)이 주관하는데 제문 내용에 동문(東門)만 나오고 창룡문은 보이지 않는다. 유추하자면 창룡문이란 별칭은 공사 준공 시점에 가서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겠다.

창룡문의 편액은 성역 의궤에는 편액을 판부사 유언호(兪彦鎬, 1730~1796)가 썼다고 되어있다. 그러나 그가 좌의정으로 임명된 것은 1795년 1월 26일이고 판부사는 이전 직책임으로 기록의 오류라 할 수 있다.

창룡문 방어체계를 보면 정면에는 옹성이 좌우에는 적대(敵臺) 같은 치(雉)가 설치되어 있다. 반면, 화서문의 경우 동쪽에는 서북공심돈이 있고, 서쪽에는 곡성(曲城)으로 처리되어 있다. 두 대문의 양식은 같으나 지형의 차이로 인한 방어체계에 차이가 있다.

요컨대 창룡문 이름의 유래는 방위에서 온 것이 아니라, 용연에서 남수문까지 연결된 용의 형태에서 기원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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