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7.08 (수)

  • 맑음동두천 24.1℃
  • 구름조금강릉 26.0℃
  • 구름조금서울 24.7℃
  • 구름조금대전 24.3℃
  • 맑음대구 26.2℃
  • 맑음울산 26.9℃
  • 맑음광주 24.3℃
  • 맑음부산 26.1℃
  • 구름조금고창 22.8℃
  • 구름많음제주 22.0℃
  • 구름조금강화 24.0℃
  • 구름많음보은 22.2℃
  • 맑음금산 23.7℃
  • 구름많음강진군 24.6℃
  • 맑음경주시 26.7℃
  • 맑음거제 25.8℃
기상청 제공

[생활에세이]나의 2월들

 

달을 하나 넘었다. 설도 지나고 1월도 뒤로 가고 2월이다. 빠르다. 아무리 바쁘게 움직여도 시간은 나를 앞지른다. 뒤로 갈수록 흐름도 가팔라진다.

벌써 2월. 어느 시인은 2월을 ‘벌써’라는 말과 잘 어울리는 달이라고 했지만 ‘아직’이라는 말도 잘 어울린다. 이때는 뭘 입어도 마땅찮다. 아직은 추워서 두꺼운 옷을 입지만 우중충하다. 백화점에 진열된 야들야들한 봄옷들 때문이리라. 아직 봄이 아닌데도 봄을 볼모로 한 마케팅에 지갑을 연다. 미리 옷을 사놓고 기다리는 것도 매년 되풀이되는 2월의 단골 매뉴얼이다.

달이 짧아서 그럴까. 손해 보는 기분이다. 아이들 학원 수강료는 달 단위로 일정하게 지불하는데 실제 수업 일수는 다른 달보다 적다. 그렇다고 이삼일 깎아주지도 않는다. 하긴 다른 달과 똑같이 받는 월급은 이득을 보는 셈이다. 그런데 밑지는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인지.

단물 빠진 애인처럼 밋밋하다. 12월처럼 크리스마스가 있는 것도 아니고 7, 8월처럼 열정적이지도 않다. 4월처럼 하늘거리지도 않는다. 겨울이라고 하기에도 그렇고 봄이라고 우기기에도 무리다.

존재감이 미미해서 안쓰럽다. 1월과 3월 사이, 까치발을 한 2월. 눈 감았다 뜨면 지나버리는 아쉬운 달이지만 2월은 2월의 자리에 있어야 한다. 적은 날짜라도, 꽃이 피지 않더라도.

발렌타인데이처럼 가끔 이벤트가 있는 달이다. 봄 날씨 같다가 갑자기 함박눈이 쏟아지는 경우다. 헤어진 연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듯 낭만적인 폭설이 퍼붓기도 하니까.

주로 2월에 있는 대보름은 농사의 시작을 알리는 날이다. 지신밟기나 쥐불놀이, 달집태우기를 하며 풍요와 안정을 기원한다. ‘February’도 대보름과 비슷한 의미다. 어원이 fire, burn, smoke 에서 유래한다. 밝은 보름달 아래서 연기나 제물을 태워 정화의식을 하는 달이라는 의미다. 한 해를 시작하며 풍년과 안녕을 바라는 마음은 동서양이 다르지 않나보다.

이때 쯤 새 학기를 준비했다. 새로 쓸 노트를 사오고 새 학기 교과서를 쌌다. 서점에서 책을 사면 얇은 종이로 겉표지를 싸주었다. 책이란 그렇게 소중하게 다루는 것이라고, 마음의 식량이니 함부로 하면 안 되는 것으로 알았다.

지금 그때를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가루약을 얇은 종이에 접어서 주던 약국이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졌듯이 책을 포장하던 1980년대는 잊혀졌다. 신이 우리에게 뇌를 주신 것은 망각하기 위해서라고 스베덴보리가 말했듯이.

그렇더라도 시간의 켜가 묻은 2월은 아직 나를 배회한다. 대보름 아침 내 입에 쪼갠 호두를 넣어주던 할머니의 거친 손이며, 쥐불놀이용 깡통에 구멍을 뚫던 아랫집 순옥이 오빠의 까만 이마라든지, 다 쓴 볼펜대에 몽당연필을 끼워 필통에 가지런히 채우면 뭔지 모르게 따라오던 뿌듯함이라든지 하는 자질구레한 기억들. 2월이면 군내가 도는 동치미처럼 찝찌름한 맛의 그것들은 이상하리만큼 또렷하다.

나의 2월들. 책을 싸거나 쥐불놀이를 따라가던 아날로그적인 기억들은 동네 키 큰 나무에 얹힌 까치집처럼 기억의 표상으로 남았다. 그렇다면 올 2월을 기억할 때도 KF 94, 혹은 KF 80의 마스크를 먼저 떠올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1월에 찾아든 불청객 때문에.

이 달도 가운데로 들어섰다. 꽃눈을 단 나무들은 지금쯤 부지런히 수액을 퍼 올리고 있을 것이다. 곧 화사한 소식도 올라오겠지. 마스크를 쓴 2월은 이제 겨울을 데리고 계절의 경계선 밖으로 가버리겠지. 바이러스까지 데리고 가면 더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