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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여행]옥산서원과 회재 이언적 선생 3

 

 

 

 

 

옥산서원에는 회재 이언적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회재는 이언적의 호이며 이언적은 조선 중기 중종 때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1491년에 태어난 이언적은 중종9년(1514) 23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순탄할 줄만 알았던 그의 관료생활은 40세(1531)가 되면서 큰 위기를 맞게 된다.

조선시대 언론기관에 해당하는 사간원에 근무 중이었던 이언적은 당시 실세였던 김안로의 재등용을 반대하면서 관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언적은 고향으로 돌아와 독락당을 짓고 다시 관직에 나오기까지 약 7년간의 은거생활을 하였다.

이언적이 다시 조정으로 나아간 것은 김안로가 죽고 난 뒤인 46세(1537) 때였다. 이후 그의 벼슬길은 승승장구 하지만 을사사화에 연루돼 56세(1547)의 나이에 또 다시 유배를 떠나게 된다. 평안도 강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이언적은 62세(1553)의 나이로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한다. 6년간의 강계생활에서 그는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구인록’도 이 시기에 완성된 것이다.

사후 13년이 지난 뒤에야 그의 신분은 다시 복권되었고, 다시 2년 뒤인 선조1년(1568)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이후 종묘에 배향(선조2년· 1569)되었다. 광해군 2년(1610)에는 동방5현으로 문묘에 모셔졌고, 옥산서원을 비롯해 전국 17개의 서원에 위패가 봉안되었다.

옥산서원은 이언적이 사망한 지 약 20년이 지나서야 설립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져 설립되었다. 옥산서원은 회재 이언적이 고향에 돌아와 은거생활을 하던 독락당 옆에 창건되었다. 이언적은 기(氣)보다 이(理)를 중시하는 성리학이었으며 이는 이황에게 계승되어 성리학의 한 일가를 이루게 된다. 이언적이 생전에 남긴 주요 저술들은 ‘이언적수필고본일괄’이라고 하여 독락당과 옥산서원에 보관되어 있으며, 보물 586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면 이언적이 낙향하여 은거생활을 하던 독락당으로 발길을 옮겨보자. 독락당에는 아직도 그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몇 걸음만 걸으면 독락당 솟을 대문을 마주한다. 솟을 대문과 대문 앞 나무 한그루 그리고, 집 뒤에 사선으로 펼쳐지는 산등성이는 자연에 안긴 독락당의 편안하고 멋스러움을 한껏 품어내고 있다.

독락당은 삼문과 행랑채, 안채와 사랑채, 계정, 어서각, 사당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나지막한 담장 길을 지나 자연스럽게 우리의 발길을 사랑채로 이끈다. 인상적인 것은 좁은 담장 길에 난 커다란 향나무이다. 담장을 뚫고 나온 향나무는 좁은 골목길의 상징처럼 강한 인상으로 다가온다.

사랑채에는 ‘옥산정사(玉山精舍)’라는 편액이 전면에 걸려있다. 대청마루 안쪽으로 독락당(獨樂堂)‘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독락당은 이 사랑채만을 지칭하는 이름이기도 하고 이 집 전체를 지칭하는 이름이기도 하다.

사랑채 대청마루에 앉아 있으려니 새소리가 집 전체에 울려 퍼진다. 사랑채 마루 한 켠에는 작은 칠판이 놓여있고 그 옆으로 서안들이 켜켜이 쌓여있다. 아직도 이 마루에서는 회재 이언적의 학문이 이어지고 있는가보다.

이제 계정으로 발길을 옮겨보자. 계정은 계곡으로 개방되었다. 계정 계자난간에 걸터앉아 계곡과 자연을 바라보는 것도 멋지지만 계곡에서 계정을 바라보는 풍경은 장관이다. 독락당 중에서도 사랑채와 계정은 이언적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이리라.

독락당과 옥산서원은 계곡을 사이에 두고 위에는 독락당이 아래에는 옥산서원이 자리해 있다. 독락당에서 이루어진 이언적선생의 학문이 계곡 물줄기를 따라 옥산서원에 다다른 듯하다.

독락당에서 계곡을 따라 옥산서원을 산책하며 이언적 선생이 연구했던 ‘인(仁)’을 생각해보면 어떨까. 코로나19로 나라가 어려운 요즘, ‘인(仁)’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시기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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