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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태근칼럼]안중근 의사 110주기

 

안중근 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북만주 하얼빈에서 이 나라를 침략한 이토 히로부미를 극적으로 처단하였다. 극적이라는 것은 독립군 활동을 하다가 그의 소식을 듣고 대기하여 사살했기 때문이다. 그는 대한의군참모중장이라는 직책의 독립군이었다. 그는 순순히 포로가 되어 여순법정에서 이토의 죄악 15개를 세계에 알렸다.

의사는 여순감옥에서 「안응칠 역사(安應七 歷史)」라는 자서전과 「동양평화론」을 저술하였다.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던 것이다. 그리고 주변의 부탁을 받아 수많은 유묵을 남겼다. 그렇게 추운 이국 땅에서 수형 생활 중 이토 사망 5개월 후 일제에 의해 순국을 하셨다. 안 의사의 순국은 3월 26일 오전 10시였고 유해는 동생인 정근, 공근에게 인계되지 않고 여순감옥 뒷산 수인(죄인)묘지에 묻혔다. 그의 유해가 반출되어 한국 땅에 묻힌다면 독립의 의지를 상징하는 성지가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45년 8월 15일 조국은 일제로부터 독립하였다. 그러나 그의 유해는 발굴되지 못했고 상해임시정부는 귀국을 한다. 중국은 내전 상태에서 공산당이 정권을 잡아 가려해도 갈 수 없는 곳이 되었고 1991년에 가서야 한·중 수교가 이루어졌다.

안 의사의 유해 발굴 사업은 한·중수교 전부터 계속 있어왔다. 북한도 의사의 유해발굴을 위해 발굴단을 파견한 적이 있었지만 묘가 사라졌다고 결론 내리고 무심히 세월이 흘렀다. 그렇게 의사가 순국한 지 100년이 다되어가도록 유해는 발굴되지 못하고 땅 속에 묻혀있었다. 수교 이후 2008년 3월 처음으로 안 의사 유해발굴이 이루어졌다. 2008년 3월 박선주 충북대 교수를 단장으로 한 유해 발굴단이 구성되어 제1차 안 의사 유해발굴이 있었다.

발굴지역인 여순의 원보산 지역은 당시 여순감옥 소장의 딸인 이마이 후사코(今正房子)의 증언과 사진 제공에 따라 시작된 것이다. 당시 제보 사진에 화살표로 표시된 곳이 의사의 묘라는 것이었고 보훈처 담당자들은 의사가 이곳에 묻혔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유해발굴은 명백한 실패이고 실수였다. 안 의사의 유해 발굴은 민간에서 계속적으로 연구가 되어 여러 증언자들이 지목하던 동산파 지역이 있었다. 정부는 그 지역을 배제하고 엉뚱한 지역을 발굴한 것이다.

당시 남북공동으로 하자는 제안으로 2006년 6월 남북공동조사단 등이 매장 추정지를 지목해 활기를 띄었다. 그리고 아파트 공사 중인 그곳에서 공사를 중단 시키고(물론 경비가 들어갔을 것이다.) 2008년 3~4월에 걸쳐 29일 간 발굴을 했으나 유해를 찾지 못했다. 그곳은 일본인들의 묘역이었다. 설마 이곳에 안 의사를 묻었을 리 없는데, 검증을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시작하고 끝난 해프닝이었다.

당시에도 500m 떨어진 동산파 지역이 매장지로 강력히 지목되고 있었는데 보훈처는 원보산 지역의 발굴을 마치고 사업을 끝냈다. 당시 보훈처의 관계자들은 서둘러 사업을 진행하고 종료하였다. 이후에도 그들은 안중근유해발굴단이라는 소위원회를 보훈처 내에 두었지만 그들이 발굴사업을 했다는 소식 없이 다시 10년 넘는 세월이 흘렀다. 참으로 안타깝고 통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직도 의사의 유해는 발굴되지 못하고 이국 땅 속에 묻혀있다. 정부는 지금이라도 적극적으로 안 의사 유해발굴에 나서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