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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휘의 시시비비]존 볼턴의 ‘뒤끝’ 드라마

 

미국 서부영화는 대개 한 명의 빠른 총잡이가 다수의 악당과 싸워 이기는 구조로 돼 있다. 한두 번 보면 식상할 만도 한 단순한 패턴인 이 서부극은 오랫동안 세계를 열광시킨 미국 영화산업의 총아였다. 뻔한 결말에도 관객들이 연속해서 찾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존 웨인’, ‘클린트 이스트우드’ 같은 걸출한 주연 배우들의 매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요인은 악당들을 시원하게 물리쳐주는 주인공에게서 느끼는 ‘대리만족’일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참모로서 백악관 안보보좌관을 지낸 존 볼턴의 ‘그 일이 일어났던 방’이라는 자서전 한 권이 세상을 뒤흔들고 있다. 볼턴은 코로나19 창궐 이후 가뜩이나 코너에 몰리고 있는 트럼프에게 연일 직격탄을 날리고 있고, 트럼프 역시 카운터펀치를 노리며 전전긍긍이다. 볼턴은 그동안의 백악관 경험담을 토대로 트럼프가 얼마나 엉터리 지도자인지를 까발리는 데 열중하고 있다.     


사적인 가치 기준과 개별적인 오감을 기반으로 작성하는 게 회고록인 까닭에 볼턴의 이야기가 사실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판단하기란 쉽지 않다. 볼턴의 폭로나, 트럼프의 반격에서 우리를 짜증스럽게 하는 것은 세계정세의 엄중함에 걸맞지 않은 정책 결정 프로세스의 이면에 있는 형편없는 인식의 가벼움이다. 한반도의 절박한 운명마저 그 유치한 논리에 휘말아 왈가왈부했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볼턴의 회고록에 근거하면, 트럼프는 오직 올 11월에 있을 대선에서의 재선에 모든 초점을 맞춰놓고 움직여왔다고 한다. 8천만의 생사가 달린 한반도 비핵화 문제마저도 트럼프는 사진 찍을 기회쯤으로만 취급했다는 폭로다. 우리가 열광하면서 염원을 실었던 김정은 위원장과의 판문점 회동마저도 사진 찍기용 이벤트로 다뤘다는 게 볼턴의 주장이고 보면, 실망을 넘어서 분노마저 치솟는다. 우리의 분단비극이 어떻게 저들에게는 한낱 사진찍기 놀잇감일 수 있나.


볼턴의 난사(亂射)는 문재인 대통령에게도 유탄을 날리고 있다. 볼턴은 2018년 6월 싱가포르 1차 북·미 정상회담을 처음 제안한 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아닌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이라고 주장했다. 문 대통령이 2018년 3월 판문점에서 김 위원장과 회담한 후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에게 “김 위원장에게 1년 안에 비핵화를 하도록 요청했고, 김 위원장이 동의했다”고 전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말하자면, 트럼프 대통령이 상황을 ‘오판’하게 한 원인 제공자가 문 대통령이라는 뜻이다. 판문점 북미회담에 동행하기를 원하는 문 대통령을 트럼프와 김정은이 처음엔 한사코 거절했다는 이야기는 모욕감을 부른다. 방위비 협상의 경우 트럼프가 ‘미군 철수를 위협하라고 주문했다’는 내막도 참담하긴 마찬가지다.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비참한 현실이 다시 한번 새록새록 느껴진다.


결국 장사꾼 트럼프는 권력 연장에만 혈안이 돼 있고, 미국 국수주의(國粹主義) 네오콘의 일원인 볼턴은 트럼프의 옆에서 고춧가루 뿌릴 궁리만 했다는 얘기다. 존 볼턴의 폭로 칼춤이나 그런 사람을 안보보좌관으로 거느렸던 일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대거리에 여념이 없는 트럼프나 후안무치하기는 마찬가지다. 볼턴의 자서전이 미국의 국제적 위상을 한참 떨어뜨릴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이쯤에서 우리는 평정심을 잃어서는 안 된다. 다시 알게 된 미국 정치지도부의 행태, 백악관 돌아가는 패턴은 참으로 한심하다. 갈라진 나라에서 신음하며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그 모순이 야속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옳고 그름’만으로 결판나는 역사가 어디 그리 흔하던가. 국제관계를 지배하는 ‘힘의 논리’는 잠시도 간과할 수 없는 상수(常數)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슬기롭게 살아남아야 한다. 솟구치는 분노에 쉽게 이성을 저당 잡혀서는 안 된다.


존 볼턴이 등장하는 서부활극, 한심한 ‘뒤끝’ 드라마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존 볼턴은 과연 라스트 신에서 쌍권총 총구에서 나오는 화약 연기를 불어 날릴 수 있게 될까. 아니면 트럼프가 권총을 멋들어지게 두 바퀴 돌린 다음 총집에 꽂게 될까. 유탄이 날아다니는 전장(戰場), 선악(善惡)의 이분법만 가지고 조마조마 가슴 졸이며 ‘대리만족’에나 빠질 수도 없는 구경꾼의 처지란 참으로 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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