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7일 평양의 조국통일 민주주의 전선 중앙위원회는 “해방 5주년 기념일에 남북통일 최고 입법 회의를 서울에서 개최하자”고 방송했다.
19일에는 “남한 국회가 동의만 한다면 21일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표를 서울로 보내든지 또는 남한 국회 대표를 평양에서 맞아 남북 국회에 의한 통일정부를 수립할 용의가 있다”고 제의했다.
6일 후에 발발하는 남침의 전주곡 치고는 너무 교활했다. 그러나 이 보다 한달 전인 5월 정치보위부는 남파 간첩 공작단원들에게 “우리 군대는 6월 중순경 남한군을 공격할 예정인데 이 공격은 아시아 해방을 지향하는 일보가 될 것이다.”라 고 했다. 6월 10일에는 북한 인민군 총참모장 강건(姜健)이 예하 사단과 여단장에게 “각 부대는 6월 23일까지 전투 배치를 위한 이동을 완료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18일에는 “공격을 개시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라”는 김일성의 훈령을 하달하였다. 전쟁은 일방적이었다. 우선 무기면에서 남한은 북한과 비교되지 않았다. 인민군은 240여대의 전차를 가지고 있었지만 국군은 한대의 전차도 없었고, 인민군이 2천500여 문의 포를 가진데 반해 국군은 800여 문의 포가 전부였다. 또 인민군은 야크(YAK)·아이아르(IR) 등 전투기를 포함한 항공기 200여대를 보유한데 비해 국군은 에이티(AT) 연습기 10대 뿐이었다.
우리 민족사에서 이처럼 처절하고, 불행하며 가장 부끄러운 골육상잔의 전쟁은 북한의 주도면밀한 사전 준비 아래 감행됐던 것이다. 불의의 일격을 당한 남한은 허둥지둥 댔고, 서울을 팽개치고 부산으로 피난 가는 수모를 당했다.
7월 5일 유엔 참전 16개 국이 우리를 돕지 않았더라면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오늘이 6·25 한국전쟁 발발 54년 째 날이다. 알고 용서하는 것과 모르고 화해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창식/주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