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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휘의 시시비비]‘묵살(默殺)’의 죄

 

‘인간은 두 종류밖에 없다. 하나는 자기를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의인(義人)이며, 다른 하나는 자기를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이다.’ 철학자 파스칼의 말이다. 그는 ‘인간은 신과 악마 사이에서 부유(浮遊)한다’는 말도 했다. 우리는 한 인간의 삶을 놓고 아는 만큼만 평가한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이 나라에서는 선악의 개념도 아적(我敵)의 가름에 종속된 지 오래다. 지독한 진영논리에 중독된 가치관들이 세상인심을 곧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다.


고(故) 박원순 서울시장이 남기고 간 숙제가 무겁고 또 무겁다. 13일 공개된 생전 박 시장의 성추행 의혹은 충격적이다. 그 기간이 무려 4년 동안이었다는 점도 그렇거니와 언어로, 문자로, 때로는 물리적으로 지속해온 추행의 양태는 상상을 초월한다. 그가 이 나라 최고의 명성을 지닌 인권변호사요 시민운동가가 아니었다면, ‘서울대 우 조교 사건’이라고 불리는, 지도교수의 성추행 사건을 만천하에 드러낸 선각자가 아니었다면 충격이 좀 덜했을까.


일방적 주장이긴 하지만, 박 시장은 피해자를 수시로 집무실 또는 휴게실 침대로 불러 “셀카 찍자”, “안아달라”고 하며 신체 접촉을 꾀했고, 다리에 든 멍 자국을 보며 “호-해 주겠다”며 입술을 갖다 대기도 했단다. 또 비밀대화방을 만들어 음란 문자나 본인의 속옷 차림 사진을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기자회견에서 “차마 밝히지 못할 내용도 있다”고 말하니, 박 시장의 성폭력 범위는 발표된 것보다 훨씬 더 깊을 개연성이 높다.


지난 2018년 기준 우리나라의 인구 10만 명당 자살 인원은 25.7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36개 가운데 1위다. 하루 평균 37.5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수치다. 나라의 수도 서울의 시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을 놓고 국민 여론이 두 쪽으로 쫙 갈라지는 일부터 안타까운 일이다. 사정상 5일 장으로 치른 것은 그렇다 해도, 독립운동 펼치다가 순국한 것도 아닌데 서울특별시장(葬)으로 치른 건 여전히 씁쓸하다.


그가 생전에 해온 일들이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실만큼은 명징하지 않나. 무엇보다도, 시민들로부터 조문까지 받은 일을 우리의 아이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걱정스럽다. 소박한 장례식이 옳지 않으냐는 이성이 복잡한 정치적 방정식으로 인해 뭉개져 버린 일을 설명할 다른 방법이 있을 것 같지도 않다. 아이들에게, 시민들에게, 국민에게 ‘자살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칠 어떤 논리와 명분이 성립하는가.


서울시 행정1부시장을 지낸 민주당 윤준병 의원과 정무부시장을 지낸 진성준 의원의 말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이 파괴된 피해 여성에게 아예 대놓고 칼질을 하는 수준이었다. 윤 의원은 박 시장의 성추행 의혹에 대해 ‘상징조작’이라는 단어를 동원해 의문을 표시했다. 진 의원은 서울특별시장(葬) 반대 청원이 55만 명을 넘은 것을 놓고 “사자 명예훼손” 운운했다. 멀쩡한 의식으로 그들의 사고체계를 이해하기란 참으로 어렵다.


이 문제를 논하는 거의 모든 이들이 피고소인의 사망으로 진위규명이 어렵다는 말을 한다. 공소권이 소멸한 시점에서 사법기관의 조사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분석을 내놓는다. 사태를 방관한 서울시가 제대로 조사할 것이라는 기대를 하기도 쉽지 않다. 조사에 나선들 수사권도 없는 행정조직으로 무슨 진실을 밝혀내겠느냐는 비관론이 많다.


다시는 이런 비극이 재발하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꼭 해야 할 일을 찾아야 한다. 피해자 측의 “서울시 내부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묵살 당했다”는 증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비상벨을 눌렀지만,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는 얘기다. 비상벨이 작동하지 않는 폐쇄 공간에서 속절없이 울고 있을 또 다른 성폭력 피해자들을 구출해내야 한다. 우선 서울시장실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세밀하게 밝혀내고, 고장 난 비상벨을 고쳐 달아야 한다.


‘신과 악마의 사이에서 부유하던’ 박원순은 악마의 꼬드김에 넘어가 실패하고 말았다. 그가 세상 사람들에게 남긴 가장 큰 숙제는 그가 평생을 추구해온 정의로운 세상을 향해 한 발짝이라도 더 나아가는 일일 것이다. 시민운동가가 대독한 피해호소 여성의 슬픈 독백이 가슴을 친다. “저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하지만 저는 사람입니다. 저는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