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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강석의 경기돋보기]발령장

 

1990년말까지 공무원들은 발령을 받으면 청사내 모든 사무실로 인사를 다녔다. 요즘에는 결재판 모양의 멋진 발령장을 받지만 당시에는 달랑 종이 한 장 위에 임용사항을 적고 직인을 찍어주었다. 이 종이 한 장을 들고 청내의 모든 사무실을 돌았다. 문서실, 발간실, 자료실, 구내식당까지 찾아다니며 발령인사를 했다. 발령장은 자신이 보이는 방향으로 들고가서 180도 돌려 상대방이 보는 방향으로 보였다. 인사를 받는 간부들은 반드시 발령장을 받아들고 내용을 살펴본 후에 다시 받는 이의 시선에 맞게 되돌려 주었다. 


1935년 전후에 태어나시고 1960년대에 공무원을 시작해서 1995년 전후에 퇴직하시고 이제는 85세 전후이신 어르신들은 발령 인사를 가면 반드시 발령장을 두 손으로 정중히 받아들고 내용을 읽고, 왼손으로 잡고 오른손 바닥으로 발령장 위를 두바퀴 정도 쓰다듬었다. 나중에 선배들께 이 정황을 물으니 발령장을 주신 기관장의 기(氣)를 받으시는 의식이라 했다. 자신의 다음번 영진(榮進), 영전(榮轉)을 희원하는 것이었다. 영진은 승진이요, 영전은 좋은 자리, 원하는 부서로 이동한 것이다. 그래서 축전에서는 공통분모인 ‘축 영전’이라 보낸다.


오전 9시에 발령을 받고 10시부터 시작하여 오후 4시까지 청내 인사를 돌고나면 발령장 양쪽에 수많은 사람들의 손땀과 지문이 묻어서 홍조를 띠게 된다. 요즘 코로나19 상황이 있었다면 발령장에 항균 커버를 씌웠을 것이다. 이렇게 하루를 견뎌낸 발령장은 바인더북에 순서대로 정리된다. 이렇게 받은 발령장은 모두 45매가 되었다. 발령지에서 소속부서를 지정하는 부서 발령장 17매가 겹친다. 40년 동안 28부서를 돌아가며 근무했다.


아마도 1997년 2월 동두천시 생연4동장 발령 인사를 다닌 것이 부서 순회 인사의 마지막이 되었다. 그것도 오전만 다녔고 오후에 가려고 계획한 부서는 인사를 가지 않았다. 오전내내 인사를 다녔는데 시군교류 발령을 축하하는 분위기보다는 출퇴근이 멀어서 걱정이라는 말씀이 많았다. 사실 집에서 98km거리에 8개 시군을 지나야하는 먼 길이었기에 선배들은 크게 걱정을 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이 위로로 들리지 않았고, 오후 인사를 다니지 않고 사무실 책상을 정리했다.


청내에서 부서를 바꾸는 수평이동의 경우에는 후행(後行)이라는 제도가 있어서 공직의 의리와 따스함을 전해주었다. 전통 혼례에서, 신랑이 혼인을 치르기 위해 신부집으로 갈 때에 친척이나 친구 중에서 신랑의 일행으로 동행하는 사람을 후행이라 했다. 승진이어도, 수평 이동인 경우에도 부서의 간부가 새로운 부서에 데려가는 아름다운 풍습이고 전통이다. 누가 선임으로 후행을 이끌고 후행팀이 몇 명인가도 당사자에 대한 판단의 기준으로 삼을 정도였다.


후행을 가면 반드시 녹차이든 커피든 음료수를 마시며 잠시 담소를 나눴다. 갈 때 개인짐은 반드시 선후배들이 나눠서 들었다. 책 몇 권, 수첩, 필기구 등 소소한 짐이지만 짐이 없으면 일부러 만들어서 들고 갔다. 결재판에 수첩 하나 달랑 들고 가는 것은 공직자의 도리가 아닌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요즘에도 후행 풍습은 조금 남아있어서 동료간 정을 나누는 기회로 삼고 있는 줄 알지만 발령장 들고 각 부서를 돌아다니며 인사를 하는 전통은 사라졌다. 오히려 국장급 간부들이 신임인사차 각 부서를 돌고 있다. 중간 간부들도 자신이 소속된 국(局)의 타과를 돌며 빈손으로 인사를 하는 경우는 있는 듯 보인다. 


돌이켜보면 발령은 발전이다. 발령을 받으면 승진한 경우가 있고 다음번 승진을 예약하는 부서로 이동하는 것이다. 그러니 발령인사를 다니는 전통을 회복해 보았으면 한다. 그리고 후행을 가는 경우 골프장 카트를 한 대 임대해서 발령자와 그의 짐을 싣고 신명나게 달려가는 이벤트를 했으면 한다. 다음번 영전, 영진을 기약하는 멋진 세레머니가 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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