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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현장에서] 감사하는 힘

  • 강유진
  • 등록 2020.08.14 06:28:40
  • 인천 1면

 

올해부터 교실에서 하는 루틴이 있다. 학생들이 등교하는 날 마지막 교시에 다 함께 감사일기를 쓴다. 하루 종일 자리에 앉아서 수업받느라 고생한 반 친구들에게 힐링할 시간을 주고, 나도 교실에서 일어난 일들을 돌아본다. 오늘을 복기하며 한 템포 끊고 소란스러운 정신을 붙잡는다. 알림장을 쓰기 전 10분 동안 끼적이는데 고요한 가운데 연필이 사각거리는 소리가 듣기에 좋다.

 

단어는 감사 ‘일기’지만 실제로는 하루 동안 감사한 일이나 스스로 칭찬할만한 자신의 모습을 세 가지 정도 찾아서 작성한다. 감사일기를 적는 아이들의 모습은 제각각이다. 금세 쓰고 쉬는 아이들이 있는 반면에, 머리를 쥐어 뜯으며 고민하다가 전에 썼던 내용을 커닝하며 분량을 채우는 친구들도 있다. 물론 한 글자도 적지 못하고 그 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아이도 있다. 처음에 감사한 일 찾는 것 자체를 어려워했던 것과 비교하면 다들 많이 나아졌다.

 

글쓰기가 끝나면 제일 먼저 내가 발표한다. 내 감사일기에는 대체로 날씨의 모습이 들어간다. 맑으면 맑은 대로 청량해서, 흐리면 운치가 있어서, 비가 오면 흙냄새와 살아나는 초록이들이 예뻐 보여서 감사하다는 내용들이다. 처음에는 날씨에 시큰둥하던 아이들도 점차 감사할 일에 그날의 바깥 풍경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모방을 통해 주변에서 감사할 일 찾는 방법을 배운다.

 

다음으로 친구들과 감사한 일을 나누고 싶은 사람을 자원 받는다. 많은 발표자가 나올 때도 있고 아무도 말하고 싶어하지 않을 때도 있다. 조금 기다리면 침묵을 깨고 누군가가 조심조심 이야기를 나누어 준다. 말하기 어려워했던 만큼 평소에 나누던 흔한 내용이 아니라 좀 더 내밀한 자신의 말을 꺼낸다. 어린이의 세계는 어른들이 보기엔 단순하지만 심오하다. 발표가 끝난 뒤 상대가 존재하는 감사함이라면 오늘 안에 그 사람에게 직접 감사함을 전달하라는 것으로 감사 쓰기를 마친다.

 

아직 어린이인 우리 반 친구들은 수업 시간에 자신의 이야기를 발표하는 것을 몹시 좋아한다. 발표를 안 시켜주면 서운해하며 따로 나에게 말할 정도다. 적극적인 아이들인데 신기하게도 감사일기를 발표하는 것은 부끄러워한다. 무언가에 감사하고 스스로 칭찬하는 일 자체가 생소한 탓인듯하다. 자신을 칭찬할 때는 목소리가 음소거 수준으로 작아지고, 말 속도가 랩퍼처럼 빨라지며, 몸이 꼬인다.

 

아이들에겐 어떤 일들이 감사할까. 감사할 일을 찾기 전 내가 예시로 들어주는 몇 가지 사례들을 차용해서 쓰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나온다. 하늘의 색이 수채화 물감을 뿌려놓은 것처럼 아름답다든지, 잠시 후에 먹을 급식의 반찬이 너무 좋아하는 것이어서 감사하다거나, 학교에서 친구들을 만날 수 있어서 정말 정말 정말 (강조의 ‘정말’이 수차례 들어가 있다) 감사하고, 코로나에 걸리지 않아 감사하다는 말을 듣고 있으면 엄마 미소가 절로 지어진다.

 

아이들과 감사일기를 쓰면서 거창한 목표를 세운 것은 아니었다. 하루를 돌아보며 세상에 감사한 일이 많고, 자신이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 느껴보는 한 해가 되자고 했다. 공부를 잘하거나 못하는 건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니지만, 내가 좋은 사람인 걸 알고 감사한 일을 찾는 건 굉장히 중요한 일이니까 함께 연습해 보자는 말도 덧붙였다.

 

감사일기를 열심히 쓰는 이유는 간단한 끄적거림이 회복탄력성을 높여주기 때문이다. 일상에서 감사한 일을 찾고 나를 토닥이는 건 실패에서 견뎌낼 힘을 길러주고, 하던 일을 망쳤을 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나갈 원동력이 된다. 아이들이 쉽게 포기하는 건 끈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다 끝낼 능력이 있는지에 대한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짧은 기간이나마 함께 감사하며 아이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봤다. 가족이 나에게 해주는 모든 일들은 당연한 게 아니라 감사한 일이고, 친구들과 만나서 놀 수 있는 상황이 소중하며, 학교에서 수업을 잘 받은 내가 기특하다는 것들을 깨닫는다. 이 순간 아이들의 표정은 어떤 지식을 알아차렸을 때보다 더 밝게 빛난다. 그런 아이들을 보며 나도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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