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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박물관의 기증유물 이야기(9)] 조선시대 족두리의 원형

영·정조 시대 사치 조장 이유... 가체 금지, 족두리로 머리양식 규정
변화과정 실증적 자료 제공 4건... 2건 17~18세기 무덤 출토, 2건은 20세기 전반
전주이씨 인평대군파 종회 기증 족두리... 18세기 유물로는 현존 유일 자료

경기도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상당수의 유물들이 기증 절차를 통해 들어온 것들이다. 개인이나 단체 등에게 있어 그 가치가 얼마나 소중할 지는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음이다. 이에 본보는 기증된 유물들의 가치와 기증자들의 뜻을 기리는 의미에서 특별 기획 시리즈를 마련했다. 도박물관 전시실의 기증 유물을 중심으로, 총 10회에 걸쳐 그 내용을 소개한다. <편집자주>

 

 

족두리는 조선시대 왕실과 사대부가 여성의 대표적인 관모로, 영·정조 시대 사치를 조장한다는 이유로 가체를 금지하고 이를 대신해 궁궐 여성의 머리양식으로 규정하면서 정착됐다. 하지만 족두리의 시작은 그 보다 이른 17세기 전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광해군 중년 이래 착용됐다고 하는 기록과 함께 17세기 전반에 걸쳐 집중적으로 출토 족두리가 확인된다.

 

이 시기의 족두리는 모자와 같이 머리에 쓰는 방식의 큰 족두리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반(1341~1401) 부인 계림이씨 초상’을 통해 그 착용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큰 족두리는 17세기 중반을 기점으로 더 이상 보이지 않다가 반세기 후인 18세기 들어 머리에 얹도록 훨씬 작아진 형태로 다시 나타난다.


18세기 가체의 사치가 극에 달하자 1747년 대신 유척기는 가체를 없애야 한다는 진언을 올리게 되는데, 이에 영조가 과거에 가체 대용으로 사용하던 족두리를 다시 사용할 것을 명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행이 잘 되지 않자, 정조는 선왕의 뜻을 이어 가체로 인한 사치의 폐단을 바로 잡고자 족두리 사용을 국법으로 정하고 이를 따르지 않는 자는 가장을 연좌시켜 처벌할 것을 선포한다. 그 후로 족두리는 여성의 관모로 현대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이번 호에서는 이러한 족두리의 시작과 변화과정에 실증적 자료를 제공하는 족두리 4건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이들 족두리는 경기도의 명문가에서 기증받은 것으로 2건은 17~18세기 무덤에서 출토된 것이고, 나머지 2건은 20세기 전반의 것이다.


첫 번째는 청주양씨 문중에서 기증한 양환 부인 성주도씨(17세기 전반 추정) 묘 출토 족두리이다. 청주양씨 기증 족두리는 2014년 충북 괴산 ‘양환부인 성주도씨 묘’에서 출토된 것으로, 2012년 포천시 ‘정주교수 양공의 묘’에서 출토된 복식 일괄을 기증하면서 이어진 두 번째 기증품 중 하나다.

 

청주양씨는 고려 말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가 혼인해 1351년 12월 고려로 올 때 원나라 공주를 배행하고 온 양기가 그 시조다. 양기는 고려에 와 명나라에 바치고 있던 동녀 5천인, 준마 3만필, 비단 3만동, 모시 6만필을 면제 받게한 공으로 ‘벽상삼한창국공신’, ‘당상백’에 봉해지고 청주·해주·송화를 식읍으로 받았으며, 청주를 관향으로 받아 청주양씨가 됐다.

 

 

두 번째는 전주이씨 인평대군파 종회에서 기증한 의원군 이혁 부인 안동김씨(1664~1722) 묘 출토 족두리이다. 이 족두리는 18세기 유물로는 현존 유일한 자료다.

 

의원군은 왕실 종친의 인물로 증조부가 인조, 할아버지는 인평대군 이요이고 생부는 복녕군 이욱이다. 1999년 경기도 하남시 인평대군파의 묘역 정리 과정에서 능창대군(1599~1615년), 의원군(1661~1722)과 부인 안동권씨(1664~1722) 그리고 의원군의 5대손인 이연응(1818~1879)의 묘에서 복식이 출토됐고, 그해 전주이씨 인평대군파 종회는 출토유물 일괄을 경기도박물관에 기증했다.

 

기증된 출토유물은 상태가 양호할 뿐만 아니라 당시의 왕실 종친의 복식을 실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적 가치가 인정돼 2013년 중요민속문화재 제276호로 지정됐다.

 

 

세 번째는 최상덕 님이 기증한 것으로, 기증자의 어머니가 1920년경 혼례 때 사용했다고 전하는 족두리이다. 2011년 집안에서 대대로 전해오던 교지, 가구, 어사화, 근·현대 생활도구 등 다양한 자료를 기증할 때 포함됐던 것이다.

 

이 족두리는 흑색 비단으로 겉을 싸고 중심에 석웅황과 꽃모양의 옥판 그리고 산호와 진주를 올려 장식했다. 안은 안감 없이 솜으로만 딱딱하게 채워져 있는데, 이는 17세기부터 20세기까지 이어진 전통 족두리의 공통적인 특징이다.

 

족두리에 대한 내력은 현재 81세인 고 최상덕 님의 동생이자 착용자(고복남)의 막내딸로부터 간단히 들을 수 있었다. 막내딸의 기억에 따르면 “이 족두리는 어머니가 혼례 때 착용한 것으로 어머니 성함은 고복남이다. 1907년생으로 1920년대 당시 은행원이던 할아버지(최선문)에게 시집올 때 사용한 것이다. 친정어머니 댁은 꽤 잘 살았는데 마포나루에서 큰 새우젓 도매업을 하셨고, 마포나루에서 제주고씨댁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지막 네 번째는 용인이씨 판관공 종손 이태한 님이 기증한 것으로 할머니와 어머니가 착용했다고 하는 족두리다. 용인이씨 가문은 초상화, 교지, 병풍, 고문서 등 약 800여 점의 자료를 기증했는데, 족두리는 그 중 하나이다.

 

기증자 이태한 님은 “족두리는 할머니에 이어 어머니까지 대대로 사용하던 것인데, 안산에 있는 사당에서 제를 올릴 때 옥색 치마저고리 차림에 장식이 없는 검은 족두리를 착용하고 남자들 가장자리에 서서 절을 올렸다. 그러나 6.25가 끝나고 나서는 하지 않았고 반월공단이 생기면서 사당도 없어졌다”고 회고했다.

 

이 족두리는 여성의 제례 예복인 옅은 옥색치마저고리, 즉 천담복(淺淡服)에 장식이 없는 민족두리를 착용했던 실제 사례로 볼 수 있다. 만약 기증이 아니었다면 결코 접할 수 없었던 유물의 내력이자, 무형의 큰 자료임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한다.

 

족두리는 현재 성인식이나 전통혼례에 사용하며 그 전통이 면면히 이어져 왔으나 그 조차도 사용이 점차 감소하고 있는 추세다. 또한 현대의 족두리는 전통의 정확한 형태와 구성을 모르고 그 외형만을 따라 제작했기 때문에 전통에서 벗어난 여러 형태의 족두리가 난무하고 있어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경기도박물관에 기증으로 들어온 족두리는 전통족두리의 기본형을 충실히 갖추고 있는, 많지 않은 자료 중 하나로 착용가문과 시대가 명확해 전통 족두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한 개인의 이야기가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영구히 남을 수 있도록 소중한 자료를 기꺼이 기증해 주신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이번 호에 소개한 족두리 중 최상덕 기증 ‘꾸민솜족두리’는 경기도박물관 1층 기증유물실에서 만나볼 수 있다. (글=정미숙 경기도박물관 학예연구사)

 

[ 정리 / 경기신문 = 강경묵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