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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준의 경기여지승람(京畿​​​​​​​輿地勝覽)]돌마(突馬) 지명은 어디서 유래했을까?


‘돌마‘. 지금은 조금 낯설어진 이 지명이 광주군 시절에는 분당 지역의 대표지명이었다.


지금은 성남시 중원구 하대원, 갈현, 도촌, 여수동과 분당구 이매, 야탑, 서현, 율동, 분당동, 수내, 정자동 일대에 해당되는 지역이 돌마면으로 불렸다.


돌마의 범위는 시대별로 변화가 있었는데, 1914년에 일본이 우리나라의 행정구역을 대대적으로 개편할 때 세촌면의 하대원이 돌마면으로 편입되었다.


돌마면 사람들은 일제강점기에 한백봉, 한순회 등이 주도한 3·1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탄천에 보를 막아 가뭄과 홍수에 대비한 이병철 등의 애향 인물을 다수 배출했다.


6·25전쟁 때에는 의사단(義死團) 40명의 단원들이 북한군 침략에 대항하다가 28명이나 희생당하기도 한 애향심이 돌처럼 굳게 뭉쳐진 고장이다.

 

 

돌마 지명의 유래는 여러 가지 설이 있어서 정확히 확정된 것이 없다.

 

지명의 한자 표기는 乭馬, 突馬, 突邁 등 세 가지로 나타난다.

 

突馬는 1577년 광주목이 생기면서 공식적인 행정단위로 돌마면이 되었고, 그 이전에는 돌마(乭馬)리로 불렸다. 조선 후기에도 여전히 돌마리라고 기록한 사례도 있다. 그 밖에 드물게 ‘돌매(突邁)’로 표기된 것이 있는데, 1546년(명종1)에 별세한 전주이씨 이효순(李孝舜)의 묘비문에 기록돼 있다.

 

돌마지명 기록으로 가장 오래된 것이 세종 때 좌의정을 지낸 이원(1368~1429)의 ‘용헌집(容軒集)’에 ‘乭馬’라고 기록이 있다.


이원(李原)이 전북 여산으로 귀양 갔다가 세상을 떴는데, 돌마면 갓골 율리(乭馬面 加次谷 栗里)에 장사지냈다고 하였다. 이원 후손이 인조반정 때 공을 세우고 이듬해에 반란을 일으켰던 이괄(李适)이다. 서거정이 지은 이원 신도비문에도 돌마면 율촌(乭馬面 栗村)에 장사 지냈다고 하였다.
고성이씨 묘역이 도촌동 주변에 많이 있었고 이괄의 난으로 이원 묘를 부관참시 하였는데, 묘에서 용의 모습이 완연한 이무기가 나와서 죽였더니 그 비늘이 수년간 흘러내렸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도촌 신도시 건설 때 출토된 유물을 보면 청동 용뉴, 화살촉, 등자 등 68점의 금속류와 도기 14상자, 자기 12상자 등의 토기와 자기류, 기와 250상자 이상, 석기 6점, 말뼈 14점 등이 출토된 것으로 보고되었다.

 

 

돌마라는 지명은 돌과 관련이 있다고 여겨진다. 서울 석촌동의 석촌(石村)은 한자표기만 그렇지 원주민들은 ‘돌마리’로 불러왔다. 석촌동에는 돌로 축조한 백제 고분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분당 신도시 개발 때 116기의 고인돌이 조사된 것으로 보아 돌마 지명도 돌과 무관하지 않다고 여겨진다.


김기빈이 펴낸 ‘분당의 땅이름 이야기’에는 병자호란 때 충청감사 정세규가 탄천의 상류인 험천(머내)에서 청나라 군사와 싸워 크게 패하였는데, 주인을 잃은 말 떼가 이곳 산골짜기에서 갑자기 나타났다고 하여 돌마면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이 설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 군사정변으로 왕이 된 인조가 이괄의 반란을 겪은 후로는 군사훈련조차 중단시켰고, 조선군은 기마병이 주력부대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병자호란 이전부터 돌마 지명이 사용되고 있었다. 현재 돌마 지명은 돌마초등학교와 돌마고등학교, 돌마교, 돌마로, 중앙공원 돌마각 등으로 남아 있다. 주민들의 돌처럼 단단한 애향심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