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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역사를 말하다] 가야불교사와 가야사의 새로운 전개를 위하여

가야불교 이야기⑨

 

 

불교는 중국에 언제 전파되었는가?

 

불교가 언제 중국에 전해졌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양(梁) 나라 혜교(慧皎)가 쓴 《고승전(高僧傳)》의 기록을 가지고 유추한다. 후한(後漢) 2대 임금 명제(明帝:재위 57~75)의 영평(永平) 7년(서기 64년)에 명제가 남궁(南宮)에서 자는데 꿈에 금인(金人)이 서쪽에서 와서 궁전의 정원을 나는 것을 보았다는 것이다. 이튿날 명제가 대신들에게 꿈 이야기를 하니 박사 부의계(傅毅啓)가 “서방에 신이 있는데, 부처[佛]라고 합니다.”라고 답했다. 이에 명제가 사신들을 인도에 보내 불교 서적과 승려들을 청했고, 영평 11년(서기 68) 수도 낙양(洛陽) 동쪽 북망산(北邙山) 근처에 중국 최초의 사찰인 백마사(白馬寺)를 세웠다는 것이다. 명제가 꿈에 본 금인(金人)을 박사 부의계가 ‘부처’라고 말했다는 것은 민간에는 이미 불교가 전래되었다는 뜻이다. 《삼국사기》는 고구려 소수림왕 재위 2년(372) 전진(前秦)의 임금 부견(符堅)이 사신과 승려 순도(順道)를 보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고구려 불교전래의 시작이 아니라 왕실불교의 시작임을 시사한다. 혜교의 《고승전》에는 진(晉)나라의 승려 지둔(支遁)이 고구려 도인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둔은 366년 세상을 떠났으므로 소수림왕 2년 이전에 고구려에 불교가 전해진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진나라 고승과 고구려 도인이 편지를 주고받을 정도면 고구려에 불교가 널리 전파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불교뿐만 아니라 여러 종교들은 국가에서 공인하기 이전에 민간에 먼저 들어와 있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가야 건국기사를 부인하는 학자들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가야가 서기 42년에 건국했고, 서기 48년에 허왕후가 아유타국에서 파사석탑을 싣고 왔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아직도 일본 제국주의가 만든 식민사학을 추종하는 한국의 강단 역사학자들은 이 기사를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내놓고 “이 기록을 안 믿는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에 앞뒤가 다른 설명을 한다. 강단사학계의 견해를 담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가야에 대한 ‘정의’에서 “서기전 1세기부터 서기 6세기 중엽까지 주로 경상남도 대부분과 경상북도 일부 지역을 영유하고 있던 고대 국가”라고 말하고 있다. 서기 1세기에 건국했다는 《삼국유사》 〈가락국기〉보다도 1세기 빠른 서기전 1세기에 건국한 것처럼 써놓은 것이다. 그러나 가야에 대한 ‘개설’에서는 “3세기에는 12개의 변한 소국들이 성립되었으며…”라고 다른 말을 하고 있다. 3세기나 되어야 12개의 소국이 생겼으니 1세기 건국설은 자연히 허구가 되는 것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6가야가 성립되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사전은 느닷없이 ‘12개의 변한 소국들’에 대해서 말한다. 이 역시 《삼국유사》 기록을 부인하겠다는 것이다. 중국의 진수(陳壽:233~297)가 쓴 《삼국지》 삼한(三韓:마한·진한·변한) 조를 믿겠다는 것이다. 진수는 《삼국지》에서 마한이 54개 소국, 진한과 변한이 각각 12개 소국으로 구성되었다고 썼는데, 이중 변한이 가야라는 것이다. 진수가 3세기 때 인물이니 3세기에야 12개의 변한 소국이 생겼다는 것이다. 진수가 3세기 때 인물이라고 그가 쓴 삼한이 꼭 3세기의 상황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료 해석의 상식은 무시된다. 우리 역사에 가장 불리한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한국의 대학 사학과를 장악한 강단사학의 역사해석법이다. 이들은 지금의 충청도·전라도·경상도에 삼한이 있었는데 경상도에는 변한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진수는 정작 《삼국지》에서 삼한은 강역이 ‘사방 4천리’라고 말하고 있다. 충청·전라·경상도는 모두 합쳐서 1천 여리 조금 넘으니 사방 4천리에는 턱도 없다. 삼한의 강역은 만주를 포함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남한 강단사학자들은 ‘사방 4천리’라는 구절은 못 본 체하고 삼한이 충청·전라·경상도에 있었다고 우긴다. 서기 3세기에도 6가야는 없었고, 12개의 변한 소국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삼국유사》 〈가락국기〉의 가야 건국기사는 가짜로 몰았고, 허왕후가 아유타국에서 가져왔다는 파사석탑도 가짜로 몰았다. 가야사가 특히 왜곡이 심한 이유는 일본 제국주의가 만들어낸 정한론(征韓論)의 핵심 이론이 가야가 임나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대 야마토왜[大和倭]가 서기 369년 가야를 점령해서 임나일본부를 세우고 562년까지 지배했다는 논리다. 그 근거는 연대부터 맞지 않는 《일본서기(日本書紀)》뿐이다. 《삼국사기》에는 그런 기록이 전혀 없다. 만약 야마토왜가 가야를 점령해서 임나를 설치하고 200여 년 동안 지배했다면 《삼국사기》 〈신라본기〉는 물론 〈백제본기〉에 반드시 관련 기사가 나와야 한다. 그러나 이런 내용의 기사는 일언반구도 안 나온다. 그래서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가짜로 모는 ‘《삼국사기》·《삼국유사》 불신론’을 만들었고 아직도 일본인 식민사학자들을 추종하는 남한 강단사학자들은 이를 교리처럼 떠받든다.

 

 

불교식 왕호 파사이사금과 장유화상

고려의 국가 사관인 동수국사(同修國史) 민지(閔漬)는 〈금강산 유점사 사적기〉에서 신라에 불교가 전해진 것이 2대 남해왕 원년(서기 4년)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신라 5대 파사이사금(재위 80~112)의 왕호인 파사는 승려를 뜻한다. 곧 승려이사금이란 뜻인데, 남해왕의 손자다. 민지가 남해왕 원년에 신라에 불교가 전해졌다고 쓴 것과 그 손자 왕에게 불교식 왕호를 올린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불교가 들어오기도 전에 불교식 왕호를 쓴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다.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서기 48년 허왕후가 아유타국에서 파사석탑을 가져왔다고 말하고 있다. 그 파사석탑은 지금도 옛 가야지역에 그대로 존재하고 있다. 나아가 옛 가야지역은 물론 지리산 자락까지 허왕후의 오빠 장유화상이 여러 사찰을 건립했다는 연기(緣起)가 전해지고 있다. 조선 숙종 32년(1706) 징원(澄元)이 쓴 〈김해명월사사적비(金海明月寺事蹟碑)〉에는 “건강(建康) 원년(144) 3월에 장유화상이 서역에서 불법(佛法)을 받들고 왔다. 수로왕이 이 도를 중하게 여겨서 불교를 숭상하는 것이 가하다고 했는데, 이것이 징험된다.”라고 쓰고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 〈가락국기〉는 질지왕 조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김질왕이라도도 한다. 원가(元嘉) 28년(451) 즉위했는데, 이듬해 세조(世祖:수로왕)와 허왕옥 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서 세조와 합혼한 곳에 절을 세워 왕후사라고 했다.”

서기 452년에 왕후사를 세웠다는 기록이다. 이해에 김질왕이 시조 수로왕과 허왕후가 합혼한 곳에 왕후사를 세웠다는 기록이지 가야에 불교가 처음 전래되었다는 기록은 아니다. 허왕후가 아유타국에서 가져온 파사석탑을 가지고 사찰을 세웠을 것임은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삼국유사》 〈금관성 파사석탑〉조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때(파사석탑을 가져왔을 때) 해동에는 아직 절을 세우고 불법을 받드는 일이 있지 않았다. 대개 불교가 아직 이르지 못해서 토인(土人)들이 믿고 복종하지 않았으므로 (《가락국기》) 〈본기〉에는 절을 세웠다는 기록이 없다.”

이 기사는 《가락국기》 〈본기〉에 수로왕과 허왕후 때 공식적으로 절을 세운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다. 일연은 이 기록에서 “탑은 4각형으로 5층인데, 그 조각이 매우 특이하다. 돌에는 작은 붉은 반점이 있는데 그 재질은 무르니 우리나라에서 나는 것이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파사석탑의 재질이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이미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

 

열린 마음으로 가야를 바라보아야

이렇게 수많은 문헌과 유적, 유물들이 가야에 일찍이 불교가 전래되었을 가능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런 사료들을 무시한 채 5세기 중반에야 가야에 불교가 전래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역사학적 방법론에도 위배된다. 가야불교사 연구는 가야건국사 연구와 동전의 양면이다. 지금껏 가야사는 일본인 식민사학자들과 아직도 이들을 추종하는 강단사학자들의 전유물이었다. 이제는 이런 구조를 깨고 열린 눈으로 가야불교사와 가야사의 진실을 찾을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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