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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인간의 의지는 평범한 표정이다

⑮ 더 스파이 - 도미닉 쿡

 

베네딕트 컴버배치 주연의 영화 ‘더 스파이’는 괜찮은 영화이지만 그렇지 않은 구석도 있는 영화다. 잘 만든 것 같지 않지만 또 그런대로 나쁘지는 않다. 인간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만 그게 다가 아닌 느낌을 주기도 한다.

 

‘더 스파이’는 1962년 미-쿠바 미사일 위기, 케네디와 흐루시초프 간 미소 냉전의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그때 세계는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갔었다. 모든 역사를 미국 중심으로, 서구 중심으로 배워 온 우리로서는 미소 냉전과 이에 따른 쿠바 미사일 위기를 오로지 당시의 소련 탓, 혹은 막 혁명에 성공해 사회주의 노선으로 선회한 쿠바 카스트로 정권 탓으로 돌렸다.

 

미-쿠바 미사일 사태는 소련이 쿠바 연안에 핵 미사일 기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핵전쟁의 위기를 말한다. 케네디와 흐루시초프 간 극적인 타협으로 핵 위기를 벗어나고 오히려 데탕트의 분위기를 맞았지만 이 과정에 불만을 품은 양측 강경파에 의해 케네디는 암살되고 흐루시초프는 사망 후 생전의 흔적이 지워진다.

 

 

당시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만들려고 했던 이유는 미국이 터키에 미사일 기지를 만들려 했기 때문이었다. 선행된 이유가 존재했지만 그 부분은 늘 역사에서 가려져 있다. 할리우드 혹은 서구 영화 역시 이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영화에서 소련 비밀정보기관인 KGB 심문요원이 주인공 그레빌 윈(베네딕트 컴버배치)에게 간첩행위를 자백하라고 강요하는 와중에 “미국은 터키에 소련을 향한 미사일 기지를 만들어 놓고 우리가 쿠바에 같은 것을 만드는 것을 비난할 수 있느냐”고 묻는다. 여기에 대해 영화 ‘더 스파이’는 명쾌한 답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질문이 들어 있었다는 자체는 좋다. 진일보한 자세다.

 

영국의 MI6와 미국의 CIA는 소련 내 최고위급에 해당하는 올렉 펜콥스키 대령(메랍 니니트쩨)에게서 정보를 얻기 위해 합동으로 스파이 작전을 편다. 대령으로부터 정보를 외부로 밀반출해야 하는데, 이미 신분이 노출된 스파이급 외교관은 이용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극히 평범한 아마추어 한 명을 선발한다. 실제로 그냥 비즈니스를 하는 장사꾼 그레빌 윈이다. CIA는 윈을 소련 상무부 소속의 펜콥스키에게 접근시킨다. 그리고 소련이 쿠바에 미사일 기지를 구축하려 한다는 계획과 그 정확한 위치, 일정 등을 알아내게 된다.

 

그레빌 윈이 첩보원으로 선발되고 소련을 오가는 얘기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스파이 브릿지’를 닮았다. 거기서도 스파이 맞교환이라는 희대의 첩보전에 동원되는 인물이 보험전문변호사다. 윤종빈이 만든 우리영화 ‘공작’도 주인공(황정민)은 북한쪽 인사를 만나며 무역업과 첩보 임무를 동시에 수행한다.

 

 

‘더 스파이’의 이야기도 처음엔 비슷한 줄기를 따라 간다. 그래서 별로 미덥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펜콥스키가 적발되고 그레빌 윈이 그를 구출하겠다고 나선 후 둘 다 체포되는 과정부터 영화는 액셀을 밟는다. 인간이 이념을 넘어 이루어야 할 일들이 무엇인가를 곰곰히 생각하게 만든다.

 

첩보조직은 펜콥스키를 버리려 한다. 그러나 그레빌 윈은 굳이 그를 구하려 나선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레빌 윈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데는 펜콥스키가 윈을 배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을 구하려는 자, 먼저 한명의 인간에게 자신의 정성을 다할 일이다. 한 사람을 구하는 자가 세계를 구하는 법이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을 얘기했지만 이 영화는 ‘의지의 평범성’을 얘기한다. 의지는 비범한 표정보다는 평범한 얼굴을 갖는다. 평범하고 보통인 사람들의 의지가 보다 큰 일과 업적을 남긴다. ‘더 스파이’는 아마추어 첩보원 그레빌 윈을 통해 그 점을 얘기하려 한다. 그런 태도는 옳다. 그러나 지나치게 미국과 서구 쪽의 시각을 우선시해서 담으려 한 점은 올바르지는 않다. 흐루시초프를 광기의 돼지 같은 이미지로 그려낸 것은 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소련이 비밀경찰국가의 시스템을 강화하고 반인권적 탄압과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억압한 것, 반체제 인사에 대한 고문이 자행됐던 것은 당연히 비난을 받아야 한다. 영화가 그런 점들을 기록하려 한 것은 올바른 선택이다. 권력과 체제가 그런 짓을 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등등을 다 뛰어 넘어 체제와 해당 국가를 비판하려면 송두율 전 뮌스터대 교수의 얘기대로 보다 ‘내재적(內在的)’이 되어야 한다.

 

‘더 스파이’는 양가적(兩價的)이다. 이중 가치적이다. 영화는 아주 잘 봐야 한다. 양 체제(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갖는 가장 적극적인 프로파간다 매체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때론 색안경을 벗고, 때론 색안경을 쓰고 봐야 한다. ‘더 스파이’가 그런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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