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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의 하늘의 窓(창)] “제국의 논리와 독립투쟁”

 

- 1898년, 미국 제국의 길로 들어서다

 

1898년은 우리에게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 3년 뒤인데 이때 태평양 가로질러 미국은 매우 중요한 전환기를 겪는다. “제국으로 가는 길”이 열리는 대단히 중요한 시기가 되는 것이다.

 

이 당시 쿠바와 필리핀은 스페인 제국의 식민지였다. 1898년은 미국과 스페인 사이의 전쟁이 일어났고 이로써 쿠바와 필리핀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게 된다. 독립? 그런데 그건 말뿐이었고 종주국(宗主國)이 스페인에서 미국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을까?

 

1898년 2월 15일, 미국의 전함(戰艦) 메인(Maine)호가 쿠바의 하바나 항구에서 의문의 폭발사고를 겪는다. 이는 스페인의 공격이라고 즉각 선언되고 미국의 침공으로 스페인과의 전쟁이 벌어진다. 필리핀 마닐라 항구에서도 미국의 함포사격이 시작되고 스페인은 쿠바, 필리핀 이 두 전선에서 모두 패한다. 이로써 스페인은 몰락하는 제국이 되었다.

 

메인호 사건은 세월이 한참 흘러 1964년 북 베트남 해안에서 미국의 매독스(Maddox)호가 공격받았다며 베트남 전쟁 개입을 공식화하는 것의 원형이 된다. 허위로 만들어진 사건이 선전포고의 근거가 된 사례였다.

 

메인호 폭파 조작사건으로 쿠바는 라틴 아메리카, 필리핀은 아시아 항로 거점을 확보하기 위한 제국의 전쟁터가 되고 만다. 1860년 미국의 남북전쟁 이후 동서를 연결하는 철도가 깔린 뒤 등장한 거대한 독점자본의 진로는 이렇게 제국주의였다.

 

 

- 제국의 독수리 날다

 

필리핀만 보자면 이 지역은 미국의 대(對) 중국 무역정책으로 선언된 “문호개방정책(Open Door Policy)”의 전초기지로 선택되었고 이를 구 식민지 종주국 스페인으로부터 탈취한 것이 1898년 전쟁의 목적이었다. “문호개방정책”은 중국의 서구 제국주의 세력의 시장으로 분할하는 움직임에 대해 미국도 권리를 가질 수 있다는 선포 외에 다름이 아니었다.

 

하와이는 미국 서부에서 아시아로 가는 중간 기착지의 역할을 주목받고 미해군기지 건설을 위해 점령당한다. 1897년의 일이었다. 오랜 기간이 걸리는 항해의 과정에서 “연료공급처(Coaling Station)”의 기능을 감당하는 섬이 바로 하와이였다. 하와이는 애초부터 미 제국주의 팽창의 군사기지로 선택되었고 1941년 일본의 하와이 기습작전은 바로 이 아시아-태평양 체제의 기점에 대한 공격이었던 것이다.

 

선(線)을 그어보면 미국 남쪽으로는 쿠바를 근거지로 해서 라틴 아메리카를 자신의 영향권으로 삼고 서쪽으로는 하와이를 거쳐 필리핀을 거점으로 아시아 지역에 대한 팽창정책의 거점을 마련한 것을 알 수 있다. 두 날개를 편 “제국의 독수리”가 출몰한 것이다.

 

 

- 남의 나라 헌법을 쓴 미국

 

 

그런데 이러한 미국의 대(對) 스페인 전쟁은 쿠바와 필리핀 내부의 독립투쟁 지원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있었다. 반(反)스페인 독립항쟁세력으로서는 미국의 이러한 전쟁정책이 환영할만한 것이 된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다르게 전개된다. 미국은 전승(戰勝) 이후 쿠바 독립이 아니라 점령정책을 실시하고 이에 저항하는 세력에 대해 무자비한 토벌작전을 밀어붙인다.

 

그런 과정을 통해 나온 것이 “플랫 수정안(Platt Amendment)”으로 쿠바의 헌법을 미국이 작성해주고 관타나모 항구를 미국의 해군기지로 쓰는 것을 보장하는 내용이었다.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했으나 이번에는 미국의 식민지 신세가 되고 만 것이었다.

 

필리핀은 어땠을까? 스페인을 축출한 뒤 미국은 “필리핀 인들은 자치능력이 없다.”고 규정하고 이들의 독립을 좌초시킨다. 이에 대한 필리핀 농민들의 저항은 거세었고 독립운동의 지도자 아기날도(Aquinaldo)는 애초 미국의 정책을 지지했다가 속았다는 것을 알고는 대미(對美)항전을 벌이게 된다. 치열한 전쟁이었다.

 

1902년 미국의 승리로 종식된 이 제국주의 지배전쟁은 무려 20만 명에 이르는 필리핀 민간인들의 희생을 가져왔고 이 전쟁의 미국측 지휘관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맥아더의 아버지 아더 맥아더였다. 이들 가계(家系)는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전쟁체제의 핵심주체였다.

 

대학살전쟁이었고 미국과 일본이 서로 필리핀과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하는 밀약 “태프트-카츠라 조약”은 이런 상황과 연동되었던 것이다. 이 밀약이 성사된 1905년은 일본이 러일전쟁을 수행하던 시기였으니 일본에 의한 조선의 식민지화는 이와 같은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정책의 큰 틀에서 보장되고 말았다.

 

1898년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 추진은 따라서 조선의 식민지 역사와 그대로 직결되고 있음을 우리는 확인하게 된다. 이는 사실 이후 100년을 관통하는 아시아-태평양 체제의 본질이다.

 

 

- 제국의 함포외교와 달러 외교

 

 

바로 이 시기에 걸쳐 미국 대통령이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가 추진했던 정책이 바로 숱한 만평에서 그와 관련해 거대한 몽둥이로 그려진 군사력을 앞세운 “함포외교(Gun-boat Diplomacy)”였다. 때는 해양의 시대였고 미국의 알프레드 마한(Alfred Mahan) 제독은 《해상세력의 역사(Influnece of Sea Power Upon History)》라는 저서를 통해 해군력 증강의 미래를 설계했다.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미국의 자본주의 체제의 확대를 노린 것이 루스벨트의 후임 태프트 대통령의 “달러외교(Dollar Diplomacy)”였던 것이다. 그가 바로 일본의 카츠라와 밀약을 했던 태프트였으며, 무기와 자본은 한 몸이 되어 “아메리카 제국주의”에 날개를 달게 되었다. 아시아의 경우, 보다 구체적으로는 중국대륙을 겨냥한 미국의 정책은 격론을 거쳐 공식화된다.

 

“제국” 또는 “제국주의”는 신대륙이라는 자부심을 가졌던 당시 미국으로서는 유럽에서 팽창되어가던 제국주의와 자신을 구별해야 한다는 점에서 용납하기 어려웠으나 현실은 제국주의 대열에 하루속히 합류하는 쪽으로 결정이 난다. 뉴욕주의 별칭은 이런 과정을 지나면서 “제국의 주(Empire State)”가 되고 1930년대 뉴욕에서는 “제국빌딩(Empire State Building)”이 들어선다. “제국”은 국가발전의 최고단계로 설정되는 것이다.

 

이런 기류 속에서 일본이 동경제국대학, 조선의 경성제국대학이라는 이름을 거리낌 없이 붙이게 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구한말 조선 역시도 제국주의 근처도 못 가면서 이름은 “대한제국”이라고 했다. 독점자본의 지배를 보편적 질서로 하는 “근대 제국” 또는 “제국주의”는 이렇게 지구 전체에 어떤 빈틈도 남기지 않게 된다.

 

 

- 반제투쟁의 역사에 무지한 우리사회

 

 

일본 제국주의 문제에 대해서는 나름 민감하면서도 아메리카 제국주의에 이르는 서구 제국주의 역사에 대해서는 면밀하게 주목하지 못하는 까닭은 여러 요소가 작동한다. 아시아-태평양 전쟁의 승전국이 미국이고 이에 무릎을 꿇은 것이 일본이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서구 제국주의의 실체는 가려진다. 해방이 약속되었지만 식민지가 되었던 쿠바와 필리핀의 역사에 대해서조차 무지한 상태다.

 

그런데 일본 제국주의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것도 또한 아니다. 독립운동사는 반제(反帝)투쟁이었고 그 과정을 통해 조선의 혁명을 목표로 한 역사적 운동이었다. 해방 후 독립운동사 연구는 1965년 한일협정 체결 이후 비로소 본격화된다. 역설적이었다. 한일협정을 통해 일본의 지배가 연장되고 있다는 걸 깨우친 세대의 대응이었다.

 

그 과정에서 밝혀진 역사의 진상 가운데 3·1 운동의 경우가 있다. 비폭력 평화시위라고 하지만 그것은 지방으로 가면 면사무소와 파출소를 습격, 파괴하는 폭력저항으로 번진다. 토지를 잃고 빈곤한 소작인으로 전락한 농민들로서는 “대한독립만세”의 구호로만 자신들의 삶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일제는 이 시기 군병력을 증강해서 곳곳에서 초토화 작전, 대살육작전을 펼친 것이었고 강력한 농민들의 저항을 무력진압 일변도로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자 무단정치를 이른바 문화정치로 바꾼 것도 이런 상황에서 비롯되었다. 3·1 혁명 이후 초기 임정의 외교노선과는 달리 만주지역 독립운동은 처음부터 무장항쟁이었고 이를 최대의 위협으로 여긴 일제는 1920년 간도 대토벌을 벌여 3만 명의 조선인들이 살육당했고 6천 호(戶)가 불태워진다.

 

 

1960년대부터 독립운동사 연구에 탁월한 성과를 내놓은 박성수 선생의 조사와 진술은 반제투쟁의 과정에서 우리가 겪은 참상을 증언해준다. 재일조선인으로서 조선사 연구에 일가를 이룬 박경식 선생의 경우도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지배시기에 저질러진 만행을 고발하고 있다. 3·1 운동 참여자에 대해 곤봉으로 쳐 살해하고 총으로 사살하는 일은 너무나 많아 일일이 거론하기조차 처참하다.

 

 

- 제국의 논리에 꺾인 독립운동 역사교육

 

이런 일들을 겪고 난 뒤 어떻게 되었을까? 누군가는 두려움으로 투항하고 누군가는 독립투쟁에 헌신하는 길로 들어선다. 박은식은 그래서 이 독립운동사를 피어린 역사, “혈사(血史)”라고 불렀다. 맥아더 군부를 상대로 한 필리핀의 농민항쟁이나 쿠바의 대미(對美) 독립투쟁이나 우리의 독립투쟁사나 그 근본은 다르지 않다.

 

그런데 우리는 수십 년의 투쟁사에서 한 번도 포기하지 않고 그 의지를 지켜 지속시켰다. 놀라운 일이다. 전 세계 반제국주의 독립투쟁사에서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경우다.

 

이런 자부심 높은 역사가 방치된 채 아무런 감동 없이 의례적인 행사로 마무리되고 교육은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는다. 더군다나 정치가 이를 멋대로 자기 자산으로 삼아 세를 과시하는 무대로 만들기조차 하고 있다. 어떤 자는 항일투쟁의 역사관에서 일본 제국주의 논리를 지지하는 주장을 하고도 아무렇지도 않아한다. 이를 문제 삼는 언론은 단 하나도 없다.

 

제국은 여전히 우리를 지배하고 있고 독립투쟁은 현재진행형이다. 제국의 신민(臣民)을 길러내는 교육도 여전하고 도처에 “플랫 수정안”이 박아 놓은 문구가 이 사회를 움직이고 있다.

 

아프리카의 가이아나 출신으로 탄자니아에서 활동했던 탈식민주의 지식인 월터 로드니(Walter Rodney)는 그의 저서 《유럽은 어떻게 아프리카를 뒤처지게 만들었는가(How Europe Underdeveloped Africa)》에서 이렇게 말한다.

 

“교육은 우리의 운명을 결정한다.”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제국이 설계해서 심어놓은 교육을 뒤집어엎지 않고는 자기가 자신의 운명에 주인 노릇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교육은 아직도 식민지 교육의 족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독립투쟁의 웅지와 민족자존은 “죽창가(竹槍歌)”에 대한 모멸로 짓밟혀도 정쟁의 시빗거리로 전락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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