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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수의 세계음악기행] ‘밥 말리의 노 우먼 노 크라이’

월드스타를 낳은 월드뮤직 4

 

 

밥 말리 하니 카오산 로드가 떠오른다.

 

90년대 초반, 배낭여행하던 중에 경유지였던 태국 방콕 공항에서 일부러 빠져나가 찾았던 거리. 300미터 남짓 되는, 길 양쪽에 음식점과 숙소, 기념품점, 술집 등이 어지러운 간판과 함께 즐비한데 그 사이를 오가는 이들은 모두가 여행자다. 생경한 풍경이었다.

 

공기도 달랐다. 술 없이도 달뜨고 취하게 했다. 뜬금없이 노래가 주술을 걸었나 생각했다. 생각하니 지금도 귀가 뜨겁다. 상점 곳곳에서 나오던 노래. 밥 말리의 노래를, 그것도 같은 노래를, 그것도 하루 종일 틀어대는 곳이 많았다.

 

노 우먼 노 크라이(No Woman, No Cry).

사랑 노래라고 생각했다. 여름이었고 청춘이었고 여행자였으니까.

 

한참 후에 알게 됐다. ‘노 우먼 노 크라이’는 밥 말리가 인생의 겨울을 사는 이들을 위로하는 노래였다. 서른여섯에 요절한 밥 말리는 짧은 생애, 노래하는 전사로 살았다. 인권과 자유, 평등을 위해 싸웠다. 그가 살았던 시대, 그를 낳은 환경이 그를 투사로 만들었다.

 

밥 말리의 고국 자메이카.

 

북미 카리브해 쿠바 밑에 위치한 이 섬나라는 1494년 콜럼버스의 발길이 닿은 후 쑥대밭이 되었다. 스페인 통치에서 영국 통치로 넘어가면서 유럽인들이 가져온 전염병과 모진 학대는 원주민 대부분을 사망하게 만든다. 영국은 그들의 빈자리를 아프리카에서 끌고 온 노예들로 채웠다. 현재 자메이카 국민 90% 이상이 아프리카 노예 후손인 이유다.

 

1960년대부터 유행한 레게 음악은 흑인 노예들의 한숨에 묻어 나온 아프리카 토속 리듬이 미국의 리듬 앤 블루스와 섞여 탄생된 것이다. 이 작고 가난한 섬나라의 신생 장르 음악을 세상에 알린 이가 밥 말리였다. 자메이카 독립(1962년 독립) 전인 1945년의 극심한 혼란기에 빈민가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학교도 제대로 마칠 수 없었던 밥 말리.

 

밥 말리가 그의 친구들처럼 폭력조직으로 흘러들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음악 재능과 종교의 힘이었다. 그가 믿었던 자메이카인의 신흥종교 라스타파리아니즘은 ‘백인들의 땅에서 결코 흑인의 행복을 찾을 수 없다. 아프리카로 돌아가 흑인의 유토피아를 만들자’는 소망을 교리로 만든 것. 밥 말리는 흑인인권, 아프리카 독립희망을 담은 노래로 전도했다. 빈곤, 정치 혼란이 계속 되는 고국의 현실을 비판하는 노래도 불렀다. 정권의 눈엣가시가 됐고 암살 위협을 받던 중 실제 총상을 입기도 했다.

 

음악전사 밥 말리의 노래는 세계 2차 대전 이후 반제국주의, 반전을 외치는 유럽의 대학가, 시위현장 그리고 물질문명을 부정하고 다른 세상을 꿈꾸던 미국의 히피들 사이에서 퍼져나갔다. 레게음악은 자메이카의 음악이 아니라 세계인의 음악이 됐다.

 

코로나로 모두가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는 중이다. 정말 끝이 있기나 한 걸까. 이 시절을 함께 견디게 해 줄 밥 말리 같은 가수, ‘노 우먼 노 크라이’ 같은 노래는 없는 것일까.

 

(인터넷창에서 www.월드뮤직.com을 치면 소개된 음악을 유튜브로 감상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