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5 (목)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고향갑의 難讀日記(난독일기)] 끝

 

 

 

낳을 자유는 있어도 태어날 자유는 없다. 아이는 부모를 골라서 태어날 수 없다. 태어나게 해달라고 조른 적도 없다. 아이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아이가 된다. 그렇다고 아이가 우연의 산물이라는 건 아니다. 아이는 부모의 의지가 빚은 사랑의 결정체다. 임신(姙娠)이라는 단어를 뒤집으면 신임(信任)이 되는 것도 그래서일지 모른다.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확고한 믿음, 그것이 부모와 자식을 연결하는 생명의 끈일 것이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일까. 시작도 하기 전에 끝나고 마는 아이들의 비극은 왜 끊임없이 반복되는 걸까.

 

며칠 전 대전에 사는 아버지가 딸을 죽였다. 태어난 지 20개월 된 아이였다. 아장아장 걷기도 바쁜 어린 딸을 아버지는 잠을 자지 않고 운다는 이유로 죽였다. 우는 아이를 이불로 덮고 주먹과 발로 때리고 밟아서 죽였다. 엉덩이뼈가 바스러지고 온몸에 피멍이 든 아이는 끽소리도 못하고 죽었다. 딸의 시체는 아이스박스에 넣어 화장실에 방치했다. 딸의 시체를 유기하고도 어머니는 보름이 지나도록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 죽은 딸의 시체가 썩어가는 연립주택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잠을 자고 숨을 쉬고 밥을 먹었다.

 

보건복지부는 2019년 한 해 동안 아동학대로 42명이 죽었다고 발표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 연구결과보다 4.3배나 적은 숫자다. 정부의 통계자료는 아동보호전문기관에 접수된 사례만 집계할 뿐, 수사기관에 접수된 사건이나 출생신고를 하기 전에 죽은 신생아는 제외시키기 때문이다.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하는 것이 아동학대의 전부가 아니다. 해야 할 행동을 하지 않는 것 또한 학대다. 헌옷수거함과 여행용 가방과 건물 옥상과 공사장 화장실에서 발견되는 신생아의 주검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젖을 먹지 못하고 굶어 죽는 것은 학대가 아닐까.

 

이런 경우는 또 어떤가. 열 살과 여섯 살 남매에게 엄마와 아빠가 약을 먹였다. ‘몸속의 벌레를 잡는 약’이라고 삼키게 한 것은 수면제였다. 아이들이 잠들자 엄마와 아빠는 방안에 연탄불을 피웠다. 이웃의 신고로 구급차가 출동했지만 아빠와 아들은 죽고 엄마와 딸은 살아남았다. 엄마는 ‘남편의 지병과 쪼들리는 빚 때문에 함께 죽으려 했다’라고 경찰조서에서 밝혔다. 이 가족의 비극을 ‘일가족 동반자살 시도’라고 신문은 전했다. 과연 동반자살이 맞을까. 죽은 아들과 살아남은 딸은 부모의 자살 시도에 동의했을까.

 

다른 나라에서는 가족 동반자살을 가족살해 사건으로 규정하고 아동학대의 범주에 포함시킨다. 명칭 또한 동반자살이 아니라 ‘자녀 살해 후 자살’이라 부른다.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 ‘오죽하면 그랬겠냐?’라는 정서가 우리 주변에 여전해서 하는 물음이다. 다시 말하지만, 아이는 부모를 골라서 태어날 수 없다. 태어나게 해달라고 조른 적도 없다. 아이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에 태어난다. 그렇게 태어난 아이의 생명을 끝낼 자격이 누구에게 있단 말인가. 설혹 신이라고 해도 아이의 삶을 끝낼 순 없다. 그렇다면 그것은 신이 아니다.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