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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전통 민속놀이는 왜 사라졌나

[일제잔재 청산 및 항일 기획시리즈] ④
공동체 놀이 통제와 탄압... 대동놀이 성격의 민속놀이 철저히 경계
비합리적, 낭비적, 위협적 또는 너무 많은 사람들 모여 안된다 명분
우리의 것들 사라지고 왜곡되는 수모... 제대로 된 원형 복원 이뤄져야

해방 76년째인 지금도 ‘친일 청산과 일제잔재 극복’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다. 우리 모두가 동참해 찾아내고 뿌리 뽑아야 할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갈 길이 멀다고 해 가지 않으면, 목적지는 그만큼 요원해질 뿐이다. 그런 점에서 경기도의 행보는 가히 주목할 만하다. 3·1운동 100주년이던 2019년부터 도내 친일잔재 조사를 시작으로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다각도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아울러 ‘항일운동’에 대한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기 위한 각종 사업들까지 활발히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문화독립’을 완성하는 날까지, 한 걸음 한 걸음 함께 나아가자는 의미를 담아 준비한 기획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진정한 ‘문화독립’ 완성하는 날까지
② 일제잔재 청산, 지속적 실천운동 돼야
③ 일제가 두려워 한, 민속신앙과 전통

④ 우리의 전통 민속놀이는 왜 사라졌나
계속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주관으로 출판된 책들의 제목을 보면 그 의도가 다분히 엿보인다. ‘조선의 풍수’, ‘조선의 귀신’, ‘조선의 향토신사’, ‘조선의 미신과 속전’ 등등. 한국이 전근대적인 사고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방법이었던 것이다.

 

결국, ‘일본은 문명, 조선은 미개’라는 프레임을 짜 한국인 스스로 믿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아울러 일제는 공동체 놀이에 대한 통제와 탄압으로 대동놀이 성격의 민속놀이는 철저히 경계하면서도, 한편으론 전통 민속놀이를 장려한다는 ‘향토 오락 진흥정책’을 추진했다. 물론 여기에는 조선인을 전쟁에 내보내기 위한 꼼수가 숨어 있었다.

 

 

한국 전통사회에선 집단놀이가 많이 행해졌는데, 이러한 우리의 민속놀이도 전근대적 유산으로 낙인찍히며 점점 쇠퇴해갔다. 소위 문화정책의 시기였다는 1920년대에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특히 3·1만세운동 이후 일제는 군중들이 모이는 집회를 철저히 경계했고, 대동놀이 성격의 민속놀이는 요주의 대상으로 삼았다.

 

지금의 우리들에겐 아마도 낯설게 느껴질 수 있는 것들이지만, 당시 사람들은 열광하며 참여했던 대표적인 놀이로 ‘돌팔매싸움(石戰)’, ‘횃불싸움’, ‘줄다리기’ 등을 꼽을 수 있다.

 

문헌에 기록된 최초의 ‘석전(石戰)’은 ‘수서’ 동이전 고구려조에서 찾을 수 있을 만큼 유서가 깊으며, 일반적으로 마을이나 지역 단위로 남자들이 편을 갈라 돌을 던지며 모의 전투를 벌이는 상무적인 놀이였다.

 

‘동국세시기’에 보면 정월 보름날이 되면 한양의 애오개 사람과 동서남의 3대문 밖 사람들이 만리현(萬里峴)에서 맞서는데, 두 패가 되어 몽둥이나 돌을 들고 싸움을 벌인다고 기록돼 있다. 흥미로운 대목은 이때 3문밖 편이 이기면 경기도 지방에 풍년이 오고, 애오개 편이 이기면 그 밖의 지방에 풍년이 든다고 했다는 부분이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은 이렇게 갈고 닦은 실력이 전쟁에서 빛을 발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의 행주대첩은 그 대표적인 예로 평가되고 있다.

 

김준기 경희대 민속학연구소 전임연구원은 “행주치마가 여인들이 돌을 나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설은 믿을 수 없다 해도 석전이 전투에 활용된 것만은 분명하다”면서, “일본은 조선군의 돌팔매 실력에 한 번 혼쭐이 난 경험이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일제는 석전이 실전을 방불케 해 사상자가 속출하기도 하는 등 위험성이 동반되기 때문에 금지해야 한다고 근거를 댔다”며 “하지만 위험성과 상관없는, 조선인의 단합과 용맹성을 기르는 다른 민속 현상도 탄압의 대상으로 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무엇을 우려했는지 짐작케 한다”고 부연했다.

 

 

이같은 현상은 ‘두레’에 관한 주의사항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전통사회에서 두레는 마을마다 50~60명 정도가 보편적이었고, 군대처럼 강력한 규율을 갖고 있었다. 서열이 확실하지 않을 경우 ‘농기뺏기’라는 치열한 싸움이 전개되기도 했을 정도란다. 이에 일제는 비용과 충돌의 위험성을 제기하며 품앗이로의 전환을 유도한다. 품앗이는 고작 3~5명 정도가 일손을 공유하는 만큼 집단 행동의 돌발성을 피할 수 있다고 여긴 까닭이다.

 

일제가 군중집회와 같은 대동놀이를 경계했다는 증거는 줄다리기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1930년 2월 11일자 A 신문에 실린 다음의 내용을 보면 금세 알 수 있다.

 

(부산) 동래에서 해마다 음력 정월 보름에 한 번씩 개최되는 줄다리기 대회는 유일무이한 대중적 운동으로서 일반 대중은 삭전의 승부를 보지 못하면 명절을 쉬지 못한 감각조차 들 만큼 갈망과 기대가 큰 대회인데, 지난 8일 하오 3시에 이르러 당국은 돌연 상부의 명령이라는 이유로 금지하여 원성이 자자하였다.

 

경기도 또한 논농사가 이뤄지는 평야 지대에서 행해지던 대규모 줄다리기 행사가 일제의 탄압에 의해 중단됐다. 어르신들의 제보에 따르면 줄다리기를 하려고 줄을 꼬는 족족 어느 틈엔가 일경이 나타나 칼로 자르고 가곤 했다는 게 김 연구원의 전언이다.

 

 

그랬던 일제가 왜, 1930년대 들어와 ‘향토 오락 진흥정책’을 추진하며 우리의 민속놀이에 관심을 갖게 됐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만주사변 이후 전시체제에 돌입하면서 전쟁 병기로 쓸 조선인의 체력을 향상시키려는 목적이 다분했다.

 

그 시범 지역으로 선정된 곳이 경기도였다. 경기도 지방과가 1933년부터 다음 해까지 조사·정리한 자료집 ‘농촌오락행사간(農村娛樂行事栞)’의 서문에는 “조선 재래의 농촌 오락은… 여러 폐해가 있는바 개선의 여지가 적지 않다. 따라서 이를 그대로 계승하거나 답습할 것이 아니라 그 공과를 가려 나쁜 점을 개선하고 좋은 점을 장려해야 한다”라고 적혀 있다.

 

이 자료집에는 당시 경기도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민속놀이의 거행 시기, 내용, 특징들과 함께 개선점, 시행상의 주의사항 등이 들어있는데, 이는 우리의 전통 민속놀이를 폄하하고 일제의 의도에 맞게 조작하겠다는 시도에 다름 아니었다. 

 

 

예컨대, 널뛰기의 경우 ▲침목은 나무를 이용하지 말고 볏단 또는 가마니를 이용한다 ▲판은 길이 7척, 폭 1척 8촌 정도, 두께는 1촌 이상으로 한다 ▲윗부분에 새끼줄을 달아 이 새끼줄을 잡고 넘어지지 않게 한다 등의 주의가 필요하다고 명시돼 있다.

 

일제는 우리의 전통 민속 중에서 어떤 건 비합리적이라는 이유로, 어떤 것은 낭비적이거나 위협적이라며, 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된다는 등의 명분을 내세워 통제를 가했다. 그렇게 우리의 것들이 하나 둘 사라지고 왜곡되는 수모를 겪은 것이다.

 

우리 민족의 전통을 바로 세우고 문화를 제대로 복원하는 일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그 무엇이 아니라, 혹은 재밌는 놀이로서의 접근이 아니라, 적어도 대한민국 국민, 경기도민의 ‘정신적 뿌리’를 찾는 일임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게다가 지금 우리가 열광하는 거의 모든 문화예술 역시 자랑스런 우리네 선조들의 전통에서 비롯됐으니 당연히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다행히 경기도를 이끌고 있는 이재명 지사는 일제잔재 청산 및 항일에 대한 의지가 높고, 실천력도 매우 돋보이는 편이다. 그래서 더욱 중요한 건 선택과 집중의 문제라는 사실을 얘기하고 싶다. 단순히 국가나 지방의 무형문화재로 지정하고 재현하는데 만족해서는 안 될 일이다.

 

무엇보다 핵심은 ‘원형을 얼마나 제대로 복원해 냈는가’의 여부가 될 것이다. 전통 민속에 관한 학문적 연구가 일제강점기 들어서부터 시작됐다는 점은 특히나 주의해야 할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어디까지나 식민지 정책을 위한 사정 자료로, 일제의 입맛대로 선별되고 왜곡된 정보를 그대로 가져다 쓰는 잘못을 저지르는 일은 절대 없어야겠다.  

  

[ 경기신문 = 강경묵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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