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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베 수의·유족 완장 장례문화, 전통 아니었다?

[일제잔재 청산 및 항일 기획시리즈] ⑥
예로부터 ‘효’ 중시해 온 우리나라, 일생의례 지내
최연우 교수 “전통 수의는 평상시 입던 가장 좋은 옷”
1934년 조선총독부 ‘의례준칙’ 발표…삼베 수의 사용 시작
상주의 완장·가슴에 다는 리본, 영좌 꽃 장식도 일제잔재

해방 76년째인 지금도 ‘친일 청산과 일제잔재 극복’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다. 우리 모두가 동참해 찾아내고 뿌리 뽑아야 할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갈 길이 멀다고 해 가지 않으면, 목적지는 그만큼 요원해질 뿐이다. 그런 점에서 경기도의 행보는 가히 주목할 만하다. 3·1운동 100주년이던 2019년부터 도내 친일잔재 조사를 시작으로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다각도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아울러 ‘항일운동’에 대한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기 위한 각종 사업들까지 활발히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문화독립’을 완성하는 날까지, 한 걸음 한 걸음 함께 나아가자는 의미를 담아 준비한 기획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진정한 ‘문화독립’ 완성하는 날까지
② 일제잔재 청산, 지속적 실천운동 돼야
③ 일제가 두려워 한, 민속신앙과 전통
④ 우리의 전통 민속놀이는 왜 사라졌나
⑤ 숨겨진 의미 알면 쓰지 못할 일제잔재어
⑥ 삼베 수의·유족 완장 장례문화, 전통 아니었다?
계속

 

 

“이제껏 전통이려니 생각하고 따랐던 삼베 수의와 유족이 차는 완장 등 장례문화가 일제잔재라니 참 애석하네요. 이제라도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바로 아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삼베로 수의를 만들어 고인에게 입히는 풍습이 사실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됐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몇 년 전 어머니의 장례를 치렀다는 경기도민 A 씨는 전통 장례문화인줄 알았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유교 전통 사상의 영향으로 효를 중시해왔다.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몸을 소중히 여겨 함부로 손상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뜻의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는 옛말에서도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은 머리카락조차 함부로 다루지 않았던 우리 선조들은 조상을 극진히 섬겼다.

 

 

2002년 경기도박물관이 발간한 ‘경기민속지 5권’을 살펴보면 선조들은 태어나서 사망에 이르기까지 한 생애에서 중요한 시기에 행하는 일생의례를 지냈다. 인생의 고비는 출생과 성년, 혼인, 사망과 같은 신체적 성장과 쇠망에 따라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라 믿었으며, 출생의례를 중시한 서양과 달리 사후의례의 하나인 제례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중에서도 사람이 태어나 살다가 마지막으로 통과하는 관문인 죽음을 다루는 의례가 상례(喪禮), 그 일부분으로 장사를 치른다고 해 매장·화장 등으로 시신을 다뤄 처리하는 의례가 장례(葬禮)이다.

 

현재 우리가 말하는 수의(壽衣)는 장례 과정 중 시신을 목욕시킨 후 평상시처럼 팔다리를 끼워서 옷을 입히는 의식에서 쓰는 옷으로 습의에 해당한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시절, 일제가 의례준칙을 통해 임의로 뜯어고친 예법을 우리 민족에게 강요하는 과정에서 수의가 변질됐다는 전문가들의 설명이 수년 전부터 계속되고 있다.

 

◆한국의 전통 수의는 평상시 입던 가장 좋은 옷으로

 

 

최연우 단국대학교 대학원 전통의상학과 교수는 2017년 ‘현행 삼베수의의 등장 배경 및 확산과정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을 통해 “삼베 수의의 등장과 정착 배경에는 일제강점기에 행해진 일제의 식민주의 정책이 있다”고 밝혔다.

 

최 교수는 한국에서 삼베 수의가 우리의 본래 전통이라는 명분 하에 상례문화로 자리 잡았고, ‘바람직한 전통’이라는 미명 아래 정착·확산시키기 위해 등장한 유언비어에 가까운 속설이 믿음이 돼 정작 우리 전통이었던 다른 소재의 수의가 점점 설 곳을 잃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꼬집었다.

 

문헌과 출토된 유물을 통해 조선시대의 수의 소재를 알 수 있다.

 

조선 후기로 가면서 유학자들이 가례주석서를 편찬하는데 대표적으로 이재(李縡)가 쓴 ‘사례편람’을 보면 수의 소재로 주, 견, 백, 금, 무명이 제시된다. 베는 남자용 홑바지에 쓰였고, ‘주나 무명, 베로 한다’는 기록이 있다.

 

 

왕실의 수의 소재는 조선시대 오례의 예법과 절차를 기록한 ‘국조오례의’, ‘국조상례보편’, ‘조선왕조실록’과 여러 왕과 왕비, 왕세자와 왕세자빈 등의 국장을 기록한 의궤 등에서 확인된다.

 

왕의 장례에는 광직, 모단, 모시 등을 썼고 왕비의 장례에는 금선, 필단, 모단, 모시 등을 썼다고 한다. 어디에도 삼베는 보이지 않는다.

 

물론 조선시대 수의에 삼베가 전혀 쓰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최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조선시대 100여기의 분묘에서 발굴된 수천 점의 옷에서 염습의 구분 없이 모든 출토복식을 대상으로 했을 때 극소수에 해당하는 몇 점의 삼베옷이 나왔다.

 

이처럼 우리 조상들은 일반적으로 평상시 입던 복식 중에서 가장 좋은 옷을 수의로 지어 입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평소에 옷감으로 사용되지 않는 삼베를 수의로 입는다는 것은 잘못 전해지고 있는 전통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조선총독부 제정 ‘의례준칙’, 유족 완장·국화 등 한국전통에 변화

 

 

광복 76주년을 맞이했으나 오늘날 국내 장례문화는 아직 바로잡아야 할 부분이 많다.

 

삼베로 만든 수의와 유족 완장과 리본, 영좌의 꽃장식 등 장례 모습은 조선총독부가 제정한 ‘의례준칙’에서 비롯됐다.

 

조선총독부는 1934년 11월 10일 전통적인 사례에 근거를 둔 간략화 된 ‘의례준칙’을 제정·공포하며, 조선시대 상장례 규범서의 하나인 ‘사례편람’의 상례절차와 내용을 대폭 축소·간소화했다.

 

조선의 관혼상제례를 인위적으로 바꾸고자 한 조선총독부는 전통적인 장례 절차를 무시하고 상주와 상복, 습렴 등에 대해 새로운 절차를 제시했다. 이때 값비싼 비단, 명주 사용을 금지하고 삼베와 무명을 수의로 만들 것을 강제했다.

 

 

상례의 제한 내용은 성복의 절차를 생략하고, 염습이 끝나면 바로 상복을 입도록 했다. 상복에는 상장을 달도록 제한하고, 양복을 입을 경우에는 완장을 차도록 했다. 또 유족이 한복 등 전통복장을 입었을 때 왼쪽 가슴에 나비 모양의 검은 리본을 달게 했다.

 

고인의 영혼을 모시는 영좌 주변을 국화로 장식하는 것도 일제의 영향이다. 한국은 사람의 시신을 실어서 묘지까지 나르는 상여를 장식하는 종이꽃 수파련 말고는 생화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전통이었다.

 

◆“오죽했으면 삼베 수의랴”

 

 

그렇다면 전통 장례문화에서 삼베옷은 누가 입었을까?

 

“나는 군부(임금)에게 죄를 얻었으니 황공한 마음으로 죽는다. 너희들은 옷은 삼베옷으로 하고 염은 삼베 이불로 하며, 띠풀로 관을 덮고 달구지로 실어다 장사하여 대략 흙으로만 덮도록 하라. 나의 뜻을 어김이 없도록 하라.”

 

1608년 광해군 즉위년에 교리 최기남이 성혼의 원통함을 풀어줄 것을 청하는 상소문에 이와 같이 성혼의 유서가 인용됐다. 성혼은 임진왜란 시 선조가 피난 중 자신의 집 근처를 지났음에도 달려와 문안하지 않았다고 해 죄를 입었고 위 내용과 같은 유서를 남겼다.

 

이를 보면 조선시대에 삼베옷은 ‘죄인이 입는 옷’이라는 관념이 형성됐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부모를 여읜 자식이 스스로를 죄인이라 여기는 뜻에서 삼베 상복을 입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밖에 현대 민속에서 삼베 수의를 가난한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마련하는 수의로 인지해 “오죽했으면 삼베 수의랴”라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온다.

 

◆전통 수의 복원→일제잔재 청산 위한 움직임 ‘활발’

 

 

전통 출토복식을 국내 최대 규모로 소장하고 있는 단국대학교는 2016년 신형 전통수의를 개발했다.

 

전통수의의 발전적 계승과 장례문화 복원에 나선 단국대 대학원 전통의상학과 최연우 교수를 비롯해 전통의상학과와 전통복식연구소에 소속된 연구진 15명이 삼베 수의가 일제잔재라는 점에서 조선시대 출토복식을 고증해 1년여 끝에 신형 전통수의를 개발한 것이다.

 

당시 최 교수는 “일제강점기에 삼베 수의가 등장하면서 오늘날 사람들이 전통수의로 알게 됐고, 그러다 보니 중국산까지 비싸게 유통되고 있어 안타까운 생각에 철저한 고증을 통해 전통수의의 발전적 계승에 착수했다”고 전했다.

 

특히 그는 “바쁜 현대인들이 전통 예법대로 모두 장례를 치를 수는 없지만, 최소한 수의는 전통을 현대적으로 복원하고, 일본 황실을 상징하는 국화꽃 장식이나 조화도 없애고 전통대로 병풍을 세우는 방식으로 개혁하는 게 필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뿐만 아니라 2019년에는 한국장례협회와 당시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간사를 맡았던 김명연 국회의원이 장례문화의 일제잔재 청산을 위해 ‘우리시대 장례문화를 진단하다’를 주제로 토론회를 공동주최했다.

 

박일도 한국장례협회장은 “일제강점기 하에 유입된 왜곡된 장례문화를 확인하고 바른 문화를 만들기 위한 시발점이 됐다”면서 “앞으로 일제잔재를 확인하고 전통을 발굴, 계승하는데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뜻을 밝혔다.

 

김명연 의원 역시 “일제에 의해 왜곡된 장례 의식과 풍습을 청산하는 것이 자주독립의 정신을 완성하는 일”이라고 목소리 높였다.

 

[ 경기신문 = 신연경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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