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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두려워 한, 민속신앙과 전통

[일제잔재 청산 및 항일 기획시리즈] ③
‘무형의 유산’인 왜곡된 전통문화 바로잡고 잔재는 청산해야
공적 국행의례까지 민간 지역의례인 마을제사로 전락시켜
우리 민족 전통의 근원적 모습 없애고 자주의식 분열시키기 위한 것

해방 76년째인 지금도 ‘친일 청산과 일제잔재 극복’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다. 우리 모두가 동참해 찾아내고 뿌리 뽑아야 할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갈 길이 멀다고 해 가지 않으면, 목적지는 그만큼 요원해질 뿐이다. 그런 점에서 경기도의 행보는 가히 주목할 만하다. 3·1운동 100주년이던 2019년부터 도내 친일잔재 조사를 시작으로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다각도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아울러 ‘항일운동’에 대한 가치를 새롭게 조명하기 위한 각종 사업들까지 활발히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문화독립’을 완성하는 날까지, 한 걸음 한 걸음 함께 나아가자는 의미를 담아 준비한 기획시리즈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진정한 ‘문화독립’ 완성하는 날까지
② 일제잔재 청산, 지속적 실천운동 돼야

③ 일제가 두려워 한, 민속신앙과 전통
계속

 

조선을 식민지화하기 위해 일제가 내건 미끼 중 하나는 조선을 근대적인 사회로 발전시켜주겠다는 사탕발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극복해야 할 문화로 매도하고, 민속 신앙을 미신으로 규정해 타파의 대상으로 삼는 일이 돼버렸다.

 

일제강점기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왜곡은 현재까지도 온전히 바로잡히지 않았고, 잔재 또한 깨끗이 청산하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특히, 이러한 ‘무형의 유산’은 개인의 가치관이나 일상, 나아가 사회 전체의 의식세계와도 깊게 관계되어지는 만큼 그 중요성이 더해진다. 강제로 빼앗긴 문화원형을 복원하고, 되찾는 일이야말로 일제잔재 청산의 시급한 과제라 하겠다.

 

◆일제강점기 국가 제사의 축소와 변질

 

‘순종황제실록’에 따르면 1908년 7월 23일 국가 제례는 ▲제실(帝室)과 관련이 있어야 하며 ▲시의(時宜)에 맞지 않는 제사는 영원히 폐지하고 ▲합사하는 것이 옳은 묘사전궁(廟社殿宮)은 옮길 장소를 찾아 봉안토록 하고 ▲대제(大祭), 별제(別祭), 속제(俗祭), 삭망제(朔望祭) 가운데 중요하지 않은 것은 생략하고 ▲신당(神堂), 아일(衙日), 고사(告祀)와 같은 것은 폐지한다고 기록돼 있다.

 

이후 각종 제사의 규모와 횟수는 축소되고, 상당수의 제사는 폐지됐다. 조선의 왕족들은 천황을 중심으로 한 왕실 봉작제에 편입시켜 종묘제례는 이어졌지만, 형식적인 의례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1926년 순종이 승하, 1928년 종묘에 부묘된 이래 종묘는 조선왕조의 상징성을 상실한 채 명맥만 유지할 뿐이었다.

 


대한제국의 국가 제례 공간은 자연스레 의례적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됐고, 일본 천황을 제신(祭神)으로 하는 조선 신궁의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일제는 1898년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주둔했던 왜성대(倭城臺)에 대신궁(大神宮)을 세웠으며, 1908년 남산에 한양공원을 조성하고, 1912년 조선신사를 세우기 위한 준비를 거쳐 1920년 5월 기공식, 1925년 10월 준공식을 치렀다.

 

이때 남산 중턱에 있던 국사당은 인왕산으로 옮겨졌고, 남산은 일본의 국조대신(國祖大神)인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와 메이지 천황을 위한 제례 공간으로 탈바꿈하게 됐다.

 

전통 유교 교육의 본산인 성균관의 경우 1911년 6월 15일 조선총독부가 경학원으로 개칭하면서 교육 기능을 없애고 문묘 석전 의례만을 유지시켰다. 그러니 일제강점기 성균관과 향교는 교육기관의 역할은 사라지고 제사 기능만 남겨진 상태였고, 교육 기능이 없는 제사 기능은 후손이 끊긴 제사나 다름 없었다.

 

결국 문묘 대성전은 일제가 전국 향교를 통제하고 간섭하는 공식 통로가 됐으며, 조선인들에 대한 황국식민화 교육정책의 일환으로 이용됐다.

 

그런가 하면, 관왕묘와 성황제 등 국가 차원의 공적 국행의례를 민간 지역의례로 바꿔 마을 제사로 전락시켰다. 마을굿의 형태로 진행되던 민간의 동제도 규제하면서 간단한 고사나 치성으로만 할 수 있게 했고, 도당굿은 도당제로 변했다.

 

 

1934년 11월 10일 조선총독부는 3·1운동 이후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인문 교화 방면의 민풍 혁신’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관혼상제의 일생의례를 대폭 축소하는 ‘의례준칙’을 반포, 의례의 간소화가 경제적 부담을 덜어준다는 측면을 내세웠다. 하지만, 이것은 효율적인 식민통치를 위한 필요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채미하 한국교통대학교 초빙교수는 “일제강점기의 제사는 대체로 조선 후기에 일반화된 제사의 절차대로 지냈고, 제사의 종류도 기일과 명절에 지내는 제사로 나뉘어져 있었다”면서, “의례준칙은 제례의 범위를 기제사와 묘제로 축소했고, 대상은 4대 봉사에서 2대로 한정했다. 제전(祭奠)의 공물(供物)도 간략하게 정비했고, 신주 대신 지방 또는 사진을 사용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일제의 전통문화 왜곡... 마을신앙 탄압, 신토(神道) 강요

 

조선의 전근대적 사고를 강조하기 위해 가장 손쉽게 이용할 수 있었던 민속 현상은 무속과 민간신앙이었다. 일제는 1912년 3월 25일 ‘경찰범처벌규칙’을 정해 무속 행위를 범법으로 규정, 강력한 단속을 통해 마을굿과 개인굿을 금지시켰다. 이는 무속의 사회적 기능, 예를 들어 민중의 오락을 대표하고 정신을 치유하는 등의 기능을 인지한 데 따른 것이다.

 

그런데 ‘경찰범처벌규칙’은 1907년에 발포된 일본의 ‘경찰청처벌령’을 모방한 것으로, 그 목적은 어디까지나 국교(國敎)의 상징인 천황제의 토대를 공고히 하려는 데 있었다. 게다가 일본에도 무속과 일맥상통하는 ‘신토’란 전통 종교현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속에 미신이라는 굴레를 씌어 집중 탄압했다는 것은 이율배반적인 행동에 다름 아니었다.

 

 

김준기 경희대 민속학연구소 전임연구원은 “일제는 문화정치기에 기존의 탄압 일변도 정책을 선회해 숭신인조합 등 무속인 조합을 묵인하는 대신 일본의 주신인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를 봉숭하도록 했다”며 “무속을 이용해 이와 유사한 신토를 국교로 삼으려는 야욕을 가동시킨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렇게 무속을 정화한다는 명목 아래 무당에게 신사신앙을 교육시키고, 이를 중심으로 무속을 동화시키기 위한 숭신단체가 경성·경기 지역에 창설되기도 했다. 한국인의 신앙적, 종교적 토대가 민속 신앙적이라는 점이 조사에 의해 밝혀지면서 정신적인 지배를 목적으로 일본 신도 속으로의 편입 가능성을 모색하려는 움직임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일제가 그토록 경계하고 끊어버리기 위해 애쓴, 우리 민족의 애향심과 대동단결의 힘은 강했다. 결국 일제가 패망하며 이러한 정책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민중예술의 쇠퇴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예컨대, 세습무 집안이 주축이 돼 만든 지역별 자치 조직으로, 수많은 재인(才人)과 광대(廣大)들이 활동했던 재인청이 1920년대에 이르러 하나 둘씩 해체되며 사라졌다. 전통 연희의 일부는 전승이 단절되기도 했다.

 

1784년부터 나름대로 엄격한 조직체계를 갖추고 130여 년간 그 명맥을 이어온 경기도 재인청(현 오산시 부산동)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역시나 ‘경찰범처벌규칙’이 큰 요인으로 작용했다.

 

 

◆각종 문화예술의 원형, ‘경기도 도당굿’... 뿌리 찾고 원형 복원해야 

 

1919년 3·1독립운동 이후 일제는 무단적이고 일방적인 동화 정책에서 벗어나 식민지의 문화, 역사, 제도를 인정한 후 지배국인 자신들의 여러 제도를 식민지에 맞춘다는, 이화(異化) 정책으로의 전환을 꾀하게 된다.

 

특히 1930년대 들어 마을의 복합적인 공동체 의례인 ‘동제(洞祭)’를 ‘부락제(部落祭)’라 칭하며 적극적인 조사에 나서는데, 그 이면을 살펴보면 불순한 의도가 도사리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30년대 초반 조선총독부가 입안한 정신 계몽운동, ‘심전개발(心田開發)’운동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마음을 잘 다스리면 경제적, 사상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선전하며 독려했지만, 실상은 사상을 통제해 식민지배 체제의 안정을 도모하고, 천황에게 순종하는 황국신민을 만들기 위한 의도가 짙게 깔려있었다. 즉, 신을 공경하고 조상을 숭배하는 마음을 이용해 천황에게 충성을 다하는 국민으로 개조하는데 ‘동제’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가를 모색했다는 것이다.

 

김준기 전임연구원은 “경기도 도당굿 같이 무굿과 풍물을 동반한 동제를 억제하고, 신토와 유사한 절차를 지닌 유교식 동제로 획일화를 시도했다. 다음 수순은 당연히 마을의 전통 신당을 신사(神社)로 교체하고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것이었다”며 “일제의 패망으로 신토를 한국의 국교로 삼으려는 그들의 술책은 실패로 돌아갔다”고 지적했다.

 

 

한반도에 마을굿 대신 일본의 국체관념인 신사신앙을 이식하려는 정책이 본격화된 것은 1936년 이후의 일이다. 일제는 ‘일읍면 일신사’를 설치해 조선인의 신사참배를 강제하고 국민의례화까지 했다. 그러나 한국 고유 동제의 특성을 과소평가하고 얕잡아 본 그들에겐 정책 실패만이 남았을 뿐이다. 

 

이는 마을굿이 혈연 간의 파벌이나 반상간의 계층 의식을 약화시킬 정도로, 마을 사람들의 공동체적 유대감과 일체감을 엮어내는 데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간과한 결과였다. 무엇보다 일제강점기의 마을굿은 우리 민족 전통의 수호였고, 자주적인 민족수호운동이었다고 평가된다.

 

다만, 신토와 유사한 절차로 획일화를 강요한 탓에, 지역별 특수성이 희석되는 피해를 입게 된 것은 너무나 아쉬운 대목이다. 경기도 각 마을에 전승되던 도당굿이 나름의 마을 역사를 반영, 특수성을 가지고 있었을 텐데 말이다. 하루라도 빨리 뿌리를 찾고 원형 복원에 나서야 할, 우리의 소중한 전통문화가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재인청도 도당굿에서 그 원류가 확인되고 있으니 더욱 그렇다.  

 

일제의 민속신앙에 대한 인식이나 정책은 우리 민족 전통의 근원적인 모습을 없애고 자주의식을 분열시키기 위한 것이었음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를 계기로 온 국민이 정신적으로 똘똘 뭉치는 기회가 만들어진다면 그보다 의미 있는 일도 없지 않을까 싶다. 

 

[ 경기신문 = 강경묵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