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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규 칼럼] 일본인 제자 이야기

 

저녁 먹고 유튜브를 보다가 우연히 이바라기 조선학교 여학생 합창단의 노래를 들었다. 제목은 <저고리>. 화면 중간중간에 옛날 흑백 필름이 나온다. 8.15 일본 패망 직후 동포들이 조선학교를 개교하던 시기. 일본 정부의 폐교 압력과 경찰의 물리적 탄압을 뚫고 (온전히 자력으로 설립한) 학교를 지키기 위해 안타깝게 싸우는 장면들.

 

위는 흰 저고리 아래는 검은 한복 치마 입은 소녀들이 머리를 질끈 묶었다. 하나의 입으로 ‘우리 학교’에 대한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 티 없는 아이들의 표정 아래에는 그러나 모국을 떠나 떠도는 디아스포라의 슬픔이 어쩔 수없이 배어있다. 가슴 한 구석이 싸했다.

 

그러다 갑자기 몇 달 전 기억이 떠올랐다. 작년부터 우리 학과에 일본에서 여학생 2명이 유학을 왔다. 한 명은 아키다견(犬)으로 유명한 열도 북쪽의 아키다 현에서. 다른 한 명은 한반도와 마주보는 동해 연안의 도토리 현에서. 부모형제 떠나 먼 땅 기숙사에서 먹고 자며 공부하는 이 아이들이 안쓰러울 때가 많았다. 첫 학기 초에는 아직 외국인등록증이 나오지 않은 탓에 카드도 없고 휴대폰도 없는 아이들 대신해서 교재를 사주기도 했다. 그중 한 학생 A와 면담을 한 게다.

 

A는 한국어 등급이 (외국인이 시험에서 받을 수 있는) 최고등급인 6급이다. 발음이 약간 어색하다 싶을 뿐 거의 완벽한 우리말을 구사한다. 공부 마치고 돌아가면 한국어 가르치는 선생이 되고 싶어 한다. 연구실에서 이것저것 이야기를 주고받는데 평소와 달리 얼굴이 밝지 않았다.

 

물어보니 그날 오전에 충격적인 일을 당했다는 게다. 휴게실 의자에 앉아 일본에 있는 친구와 문자를 주고받고 있었단다. 당연히 히라가나와 가타카나를 써서. 근데 옆 자리에서 그 모습 지켜보던 여학생 하나가 다짜고짜 입에 담을 수 없는 쌍욕을 퍼부었다는 게다. “일본년...”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A는 저항도 못하고 그저 당하기만 했단다.

 

아이가 울 것 같은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순간 마음이 아득해졌다. 말문이 막히며 내 낯이 붉어졌다. 그리고 뒤를 이어 속에서 뜨거운 무엇이 솟구쳤다. 분노였다.

 

“어떤 녀석인지 기억하니?”

 

“처음 보는 학생이었어요.”

 

고개를 숙인 A에게 애써 위로를 건넨다. 어느 나라에서건 짐승 같은 것들이 있다. 일본에도 한국인 차별하고 혐한 부르짖는 재특회(在特会)가 있지 않느냐. 한국에도 사람 그 자체가 아니라 그가 속한 인종, 나라, 민족, 언어의 껍데기만 보고 나쁜 말과 행동하는 부류가 있다. 무시하고 잊어버려라. 그리고 혹시라도 다음에 그 녀석 마주치거든 바로 내 연구실로 뛰어와서 누군지 알려 주거라.... 그렇게 건네는 내 말이 자꾸만 더듬거렸다.

 

아이가 나간 다음 소파에 한참이나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가슴속에 지펴진 불씨가 점점 커진다. 일본인 아니라 일본인 할아비라도 그렇지, 갓 스물 넘은 대학생이 제 나라에 공부하러 찾아온 외국 친구에게 이런 행동을 할 만큼 비뚤어져 있다니.

 

프란츠 파농과 에드워드 사이드 등이 본격화시킨 것이 인종적 타자화(他者化) 개념이다. 아비투스와 선동에 의해 이런 관념을 내재화시킨 동일자(the same)들은 자신의 열등감을 투사하고 문화적, 도덕적, 존재적 우월감을 높이기 위해 늘 타자(the other)에 대한 배제와 편견을 구축한다. 유럽인이 아랍인에게 그랬고, 백인이 흑인에게 그랬고, 식민지 시대 일본인이 조선인에게 그랬듯이.

 

요 몇 년 간 한일관계가 크게 악화된 것은 사실이다. 멀리는 역사교과서 왜곡에서 가까이는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둘러싼 충돌에 이르기까지 연이어 악재가 쌓이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대일관계가 악화되었다 해도 해당 국가체제와 실존으로서 인간은 분리되어야 한다. 이런 행동을 하고도 재일동포들이 일본에서 민족차별받는다고 분노할 자격이 있을까. 그 나라의 저질 극우세력을 욕하고 비판할 자격이 있을까.

 

학생처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전체 학생에게 특별교육을 시켜서라도 국적불문 외국인 학생 대상으로 이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요청을 했다. 서로 걱정을 나누었다. 보직자회의에서 사건을 알리고 대책을 만들겠다고 답을 했다. 그것이 사건의 자초지종이었다.

 

인종적 편견은 물론 계급배경, 심지어 지역균형선발 같은 입학경로에 따라 같은 학교 안에서조차 차별과 배제의 악행이 시도된다는 소문이 오래전부터 파다하다. 자기와 다른 것은 모두 틀리다고 확신하는 마음들. 최소한 상식과 인간애조차 짓밟는 극우의 광기가 대학으로 서서히 밀려오고 있는 것이다. 며칠 전 입국한 390명의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이 생각 안 날 수 없다. 지금은 환영 일색이지만 이 분위기가 언제까지 지속될까. 입국 조건은 다르다지만, 이들은 제주도에서 겪었던 예멘 출신 난민들의 고통을 완전히 비껴갈 수 있을까.

 

수업 들어갔을 때 맨 앞줄에 앉은 A의 표정이 여전히 어두웠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 얼굴이 몇 달을 지나 불현듯 눈앞에 떠오른 것이다. 조금 전 인터넷에서 마주친 조선학교 여학생들 모습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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