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7세기 중엽 동아시아 국제 정세 속 고대 중국(당나라)에 거주하던 한인(韓人) 활동과 역할 등이 고스란히 기록된 묘지명을 판독, 번역한 책이 나왔다. 향후 100년 안에 다시 나오기 어려운 연구성과가 담겨있어 한국 고대 묘지명 연구의 결정판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가 최근 펴낸 ‘재당 한인 묘지명 연구’ 자료편과 역주편(권덕영 저)을 소개한다. 이 책은 고대 당나라 거주 한인 묘지명 32점을 전수 조사해 분석한 내용을 담고 있다.

■ 재당 한인(在唐韓人), 고대 중국에 거주하던 최초의 해외 동포
선사시대에도 사람들은 한반도와 중국 등지를 끊임없이 오갔지만, 당시는 국가나 국경의 개념이 모호했기 때문에 이들의 움직임은 단순한 ‘이동’에 불과했다. 그러나 점차 국가가 형성되고 국경이 생기면서 경계라는 개념 속에서 사람들은 삶을 영위하고 소속된 채 생을 마감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삼국이 형성된 후 7세기 중엽 이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중국 세력을 몰아내는 과정에서 기존 경계나 터전에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이 시기 이후 수많은 고구려, 백제, 신라 사람들이 자의 혹은 타의로 당나라로 이주했고, 이들의 후신인 발해 사람들도 당나라에 들어가 장안(長安)과 낙양(洛陽)을 비롯한 중국 전역에 흩어져 생활했었다.
이렇게 당나라에 들어가 삶을 영위하던 사람을 통칭해 ‘재당 한인(在唐韓人)’이라 하겠고, 이들은 일종의 최초 해외동포이기도 하다.
■ 재당 한인 묘지명을 통해 문헌자료 한계 극복, 한국고대사 연구 외연 확장
묘지명(墓誌銘)은 죽은 이의 생애와 공로를 후세에 전하고 무덤 주인이 누구인지를 알리기 위해 묘주 선조와 가계, 활동과 업적, 죽음과 장례, 후손과 무덤 위치, 묘주에 대한 칭송의 글을 새겨 무덤 속에 넣은 석판(石板) 또는 거기에 새긴 글의 총칭이다. 그래서 묘지명에는 개인의 사소한 생활 모습부터 국가 대사(大事)와 관련한 중요 사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내용이 포함돼 있다.
이 모든 것이 역사의 한 장면이거니와, 이런 점에서 묘지명은 중요한 역사 연구 사료이다. 특히 묘지명을 주목하는 이유는 시간이 한참 지난 후 기록하는 문헌자료보다 당대에 바로 작성된다는 점에서 적시성이 높기 때문이다. 재당 한인 묘지명도 7세기 중엽 긴박하게 돌아가던 동아시아 국제 정세와 고구려·백제 지배층 동향, 당나라 이주 후 활약과 한인으로서의 정체성 문제, 타국 생활과 당의 이민족 지배 정책, 당에서의 정치·군사·문화 활동과 역할 등을 생생하게 전해줌으로써 한국고대사의 사료적 한계를 극복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 묘지명 판독의 엄정성, 번역의 정확성, 주석의 풍부성을 담보하다
지난 100여 년 동안 중국에서는 당대(唐代) 한반도 삼국과 발해에서 중국으로 건너간 사람과 그 후손들의 묘지명이 여럿 발견됐다. 고구려 유민 묘지명 17점, 백제 유민 묘지명 10점, 재당 신라인 묘지명 4점, 발해인 묘지명 1점 등 총 32점이다. 이 책에서는 재당 한인 묘지명 32점을 전수 조사해 자료편과 역주편으로 나눠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연구했다.
32개 금석문에 주석만 2112개에 달하며, 한국, 중국, 일본 논저를 아우르는 연구 성과 반영, 묘지명에 쓰인 각 단어 출처와 용례까지 그야말로 역사, 고전문학, 고문서, 서지학 등을 망라한 것이다.
자료편에는 32점 묘지명을 재당 한인 묘지 발견과 전승, 판독과 연구성과를 포괄할 수 있도록 묘지명 탁본을 전부 수록했다. 특히 중국을 수십 차례 직접 방문해 현재까지 전해지는 여러 탁본 가운데 가장 원본에 가까운 정본을 수집하고, 각종 이체자(異體字) 분석을 통한 엄밀한 판독을 이끌어냈다.
역주편에서는 묘지명 내용을 모두 현대어로 정서한 후 원문 표점과 띄어쓰기를 통한 정확한 해석을 시도했다. 기존 연구성과를 섭렵하고 다양한 전거를 통해 기존의 번역을 수정·보완함으로써 완성도를 높였는데, 한문이나 서지학적 정보에 그친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과 배경까지 함께 검토됐다는 점에서 차별성이 있다. 또한 2112개에 달하는 풍부한 주석은 이 책의 강점이다. 원 자료에 근거한 풍부한 설명, 인물·지리·관직·사건·용어 등에 대한 풍부한 전거 제시, 기존 단편적으로 다룬 묘지명 주석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풍부한 내용은 책의 깊이와 완성도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 국내 학계에 최초로 소개되는 고구려 묘지명 탁본 3점
이 책에서는 지금껏 공개되지 않았던 고구려 유민 고자(高慈), 고모(高牟), 이타인(李他人) 3인의 묘지명 탁본을 처음으로 소개한다.

고자 묘지명 주인공인 고자(高慈)는 당나라에서 활약했던 고구려 귀족 출신 무장으로, 아버지인 고질과 마미성에서 함께 전사해 같은 해 같은 날 낙주합궁현 평락향에 묻힌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 묘지명의 정확한 출토 경위는 알 수 없지만, 비문의 내용만 중국학자 뤼전위(羅振玉)를 통해 알려졌을 뿐 탁본은 지금까지 공개된 적이 없었다. 이 자료는 중국 국가도서관에 소장된 탁본을 대한민국 국회도서관의 도움을 받아 어렵게 입수해 소개한 것이다.

고모 묘지명 주인공인 고모(高牟)는 당나라에 귀순해 표도위대장군을 역임한 고구려 유민이다. 고모 묘지석은 현재 소재지를 알 수 없고, 지석 탁본만 전하는데, 이번에 소개된 탁본이 현재까지 알려진 고모 묘지명에 대한 유일한 자료이다. 이 자료는 저자가 낙양(洛陽)에서 탁본을 발견, 구입해 소장하고 있다.

이타인 묘지명 주인공인 이타인(李他人)은 책성 출신으로 집안 대대로 태대사자와 책주도독을 역임한 고구려 귀족 후손이다. 이 묘지석 소재지는 발견 직후부터 행방이 묘연해 알 수 없고, 최근 탁본 2점만 세상에 알려졌다. 그중 1점을 저자가 시안(西安) 현지에서 구매해 소장하고 있다.
(정리=한국학중앙연구원 구자현 홍보 전문위원)
[ 경기신문 = 김대성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