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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준의 경기여지승람(京畿輿地勝覽)] 34. 달래내 고개와 세종 영릉(英陵)

 
우리나라의 전통적 사고 관념 속에는 풍수지리가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다. 풍수지리는 우리나라의 아주 오랜 옛날부터 내려오는 전통 지리학으로서 왕조의 교체기나 중요한 국책 사업에는 반드시 풍수지리학의 검증이 있었다. 역대 왕조의 도읍을 정하는 것과 궁궐의 위치를 정하는 데에도 현장 답사와 치열한 논쟁을 거쳐 결정하였다. 조선이 건국하고 한양으로 도읍을 정하는 과정에서 왕십리(往十里) 같은 지명도 생겼다.
 
역사상 이름난 풍수가 중에는 조선 초기에 최양선(崔揚善)이 있었다. 그는 태종의 헌릉(獻陵) 지맥을 보호하기 위해 천천현길(穿天峴路)을 막고 통행을 금지할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세종 승하 후 묻힐 수릉(壽陵)을 헌릉 앞에다 자리 잡을 때 극렬히 반대하였다. 천천현은 천천현(穿川峴), 천림령(天林嶺), 월천현(月川峴) 등 다른 표기도 있는데 요즘 표기로는 달래내 고개라고 교통방송에 매일 나오는 곳이다.

 

 
최양선이 천천현길을 막자고 주장한 이유는 고갯길에 흙이 깎여 나가고 파이는 것이 매우 불길하다는 것이었다. 세종 때부터 폐쇄 논의가 있었던 이 고개는 문종과 세조 때 치열한 논쟁을 거쳐 고갯길에 흙을 북돋우고 토성을 쌓아 한 때 길을 폐쇄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헌릉의 주산에서 내려오는 지맥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 토성 아래 위치한 마을이 판교의 성내미마을이다.
 


세종 25년(1443) 2월 2일 의정부와 예조에서 최양선을 벌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거절하였다. 세종의 수릉을 정하는데 최양선이 "곤방 물이 새 입처럼 갈라졌다(坤水分觜)"하고, 그 해로움을 논하기를 "손이 끊어지고 맏아들을 잃는다.(絶嗣損長子)"고 불길한 징조를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양선의 반대를 뿌리치고 세종은 승하 후 헌릉 앞에 능자리를 잡았는데 과연 최양선의 말은 현실이 되었다. 세종의 장남인 문종이 일찍 죽고 문종의 장남인 단종이 세조에 의해 목숨을 잃었으며, 6명의 대군이 잇따라 죽고, 세조의 장남인 의경세자(덕종 추존) 또한 어린 나이에 죽었다.
 
그리하여 세조 13년(1467)에 신숙주·구치관 등에게 영릉의 개장을 의논하게 하고, 신숙주로 하여금 경기지역에서 땅을 가려 정하게 했는데, 신숙주가 돌아오니 자금배(紫金杯)를 내다가 술을 잔에 따라 마시었다. 또 영릉의 산형도(山形圖)를 보고 이내 안효례·최호원 등을 불러 길흉을 변론하게 하였더니 안효례가 흉하다고 하면 최호원도 또한 흉하다고 하고, 안효례가 길하다고 하면 최호원도 또한 길하다고 하여, 모두 우물우물하고 길흉을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므로, 의금부의 옥에 가두게 하고 파직시켰다.
 


세조는 천릉(遷陵) 사업을 못 이루고 승하하였고, 예종 1년(1469) 2월 30일, 영릉을 옮겨 모시기 위해 능을 파서 여니, 능 안에는 물기가 없고, 재궁(梓宮)과 복어(服御)가 새것과 같았다. 세종이 승하한 지 19년이 지났는데도 모든 것이 전혀 상하지 않고 그대로였다는 것이다. 천릉 작업은 부역꾼 5천 명과 석공 등 공장(工匠) 150명이 20일 동안 작업하기로 했다. 그리고 여기에 소요된 식량은 쌀이 1323석 5말이고, 소금이 41석 3말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15일이 더 소요 되었으니 실제 들어간 비용은 이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그리고 상여꾼은 1천 명이  2교대로 운구 할 예정이었지만, 500명을 증원하여 500 명씩 하루 3교대로 나뉘어 운구하였다.

 

[ 경기신문 = 김대성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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