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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균의 재미있는 인천 31 - 인천항에 이별은 없다

 저녁식사 후 어쩌다 TV를 보면 거개가 ‘정치’ 아니면 ‘노래’ 프로그램이 줄줄 흘러나온다.

 

‘좋은 노래도 세 번 들으면 귀가 싫어한다’는 옛말이 있다. 짜증스러울 때도 있다. 대중음악(가요)의 골격에는 ‘사랑’ ‘이별’ 그리고 ‘눈물’이 꼭 들어있다. 혹여 별곡으로 반짝, 한 도시와 한 계절을 수사하며 음원차트 상위권에서 머물기도 한다.

 

대중음악과 지역성은 어떤 형식으로든 연결점이 존재하며 가요의 경우는 한 지역이 두드러지게 가사에 표현되어 그 도시 시민에게 다가가 역사성을 표출하게 되며 지역 축제에 등장, 질리도록 듣게 되는 현상을 낳기도 한다.

 

수년 전 여수엑스포 개최 시기에 나온 ‘여수 밤바다’가 그러했고, 벚꽃 철이면 불려지는 ‘벚꽃엔딩’ 또한 그렇다.

 

1935년에 있었던 ‘향토 노래 현상 공모’는 전국 10대 도시 찬가 가사 모집 행사로 당선작에 곡을 입혀 음반을 발매한 행사로,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 이 때 탄생해 지금까지 불려 불후가 되어있는 것이다.

 

86년 전의 일이지만 인천의 인구가 7만 5000명으로 작은 도시가 아니었건만 왜? 10대 도시 선정에 들지 못한 아쉬움이 지금도 남아있다. 그 때 10대 도시로 선정, ‘인천노래’가 탄생됐다면 인천의 대중가요 1호로 ‘인천 최초’ ‘전국최고’로 남아 우리 곁을 지키지 않았을까.

 

변변한 방송국이 없어 방송을 통해 대중음악이 형성되고 전파를 타는 다른 지역과 달리 인천의 노래가 불려지지 못하는 아쉬움은 그런 이유가 아닌가 생각된다.

 

극장의 경우는 서울보다 더 앞섰던 인천은 공간적 한계를 벗어나 있었건만 전국규모의 순회연주회가 번번이 제외되는 일은 서울이 가까운 도시라서 그렇다면 어불성설이 아닐 수 없다.

 

인천을 모티브로 한 ‘인천의 노래’는 149곡이나 된다. 가사 속 몇몇 지명을 빼고 나면 인천의 정체성과 지역성이 별반 없는 경우가 많으나 그마저도 불려지지 못한 원인을 찾기란 난감할 뿐이다.

 

인천의 대중음악 번성기는 1937년쯤으로 볼 수 있다. ‘전 인천음악대회’를 매일신문 인천지사(국)가 개최해 연주가 전기현과 김흥산 그리고 가수로는 이화자와 묵해낭이 탄생됐다.

 

작곡가 박시춘과 기타 연주를 한 김흥산은 ‘스타레코드’사를 설립하며 ‘슈산보이’ ‘삼다도 소식’ 등을 발표, 인천인으로 ‘소파상’을 수상한 반면 전기현은 250여 곡을 작곡한 인물로 ‘인천부청’에 근무하기도 했던 작곡가이다.

 

권번 출신의 가수로 일제하에 대중의 인기를 누린 이화자, ‘꿈꾸는 눈썹’을 부른 묵해낭 등은 인천 대중음악의 디딤돌을 놓은 보배이며 목포에 ‘이난영’이라면 인천의 ‘이화자’ ‘묵해낭’으로 수사되는 것이다.

 

대중가요로서 인천을 소재로 한 곡은 ‘이별의 인천항’(1954, 세고천 작사, 전오승 작곡, 박경원 노래)을 필두로 10여 편에 이른다.

 

현재 잘 나가는 가수가 부른 가요만 해도 4곡으로 ‘바다의 나그네’(오기택 노래), ‘갈매기 사랑’(설운도 노래), ‘월미도를 아시나요’(주현미 노래), ‘연안부두’(김트리오 노래)가 그것이다.

‘쌍고동이 울어대는 이별의 인천항구/ 갈매기도 슬피우는 인천항구

항구마다 울고가는 하루살이 사랑인가/ 정들자 이별의 고동소리 목메어 운다

등대마다 님을두고 내일은 어느항구/ 쓴 웃음친 남아에도 순정은 있다

항구마다 웃고가는 하루살이 사랑인가/ 작약도에 등대불만 가물거린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 발표된 ‘이별의 인천항’은 짧은 ‘만남과 헤어짐’이 돋보이는 항구의 엘레지다.

 

이별의 슬픔으로 노랫말이 반복되지만 슬프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사회적 맥락을 지니지 못한 원인으로 외항선원의 하룻밤 사랑만을 묘사한 ‘항구’라는 단어가 환기하는 평범한 이미지에 머문다. 그래도 항구를 노래한 노래 중의 하나로 남아있는 것은 전란 후 사회적 혼란기와 때를 같이 했기에 싶다.

 

‘날씨가 좀 풀린 탓일까.

월미도는 사람이 적지 않다.

작약도(물치섬)는 물 위에 떠 있다.

등대도 없이.’/ 김학균 시인·인천서예협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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