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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갑의 難讀日記(난독일기)] 별(別)

 

발등이 부었다. 통증은 속에 있고 붓기는 밖에 있다. 바깥을 보면서 속을 다독인다. 고장은 발등의 기다란 뼈와 중지발가락이 만나는 관절에서 났다. 손톱만한 관절 하나가 사람을 기울게 한다. 나눠져야 할 무게중심을 왼발 하나가 도맡는다. 발가락의 고장으로 하루가 절뚝거린다. 더딘 걸음을 잰걸음이 부축한다. 길은 멀고 겨울 해는 짧다.

 

쏟아지는 군중 속에서 ‘나’는 ‘우리’가 되고 만다. 출퇴근길 인파속에서, 난무하는 구호와 외침 속에서, ‘우리’와 무관한 ‘나’로 개별적이긴 힘들다. 모래사장에서 각기 다른 모래 한 톨의 개별을 가리는 것처럼 난해한 일은 없다. 산을 보며 나무를 헤아리기 어렵듯이 숲에 앉아 산을 그리는 것 또한 쉽지 않다. 하물며 역사에 묻힌 개별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개별의 역사는 기록되지 않는다. 사건사고로 회자되기는 하지만, 개별의 역사는 보편의 역사에 묻혀 사라지고 만다. 그렇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니다. 개별의 역사는 오늘도 시퍼렇게 눈을 뜨고 엄연하다. 매스컴마다 온갖 개별의 역사로 빼곡하고, 빼곡한 역사마다 찬성과 반대의 각기 다른 댓글이 꼬리를 문다. 무는 꼬리와 상관없이 기억하지 못할 역사들이다.

 

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일기를 제외한 일체의 기록물은 어떤 의도에서 기록될까. 기록을 원하는 자의 편에 서서 기호와 문자를 나열하는 게 역사일까. 밟힌 사람들의 사연을 밟은 자들의 논리로 해석하는 게 역사일까. 폭력의 역사 또한 그러하여서, 죽은 자들의 역사를 죽인 자들의 역사로 덧씌우는 게 역사일까. 그런 이유로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는 것일까.

 

언젠가 최순영 선생과 한상균 선생을 인터뷰하며 살아온 날들에 대해 전해 들었다. 보편의 역사에 가려진 개별의 역사는 아리고 쓸쓸하였다. YH노동조합도, 쌍용차 사태도, 김경숙 열사도, 서른 명의 쌍용차 희생자도, 나와는 별개의 역사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도리질해 지울 수 없음은, 그 개별의 역사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권리는 하루아침에 뚝딱 얻어낸 것이 아니다. 뿌림 없는 거둠은 없고, 씨앗 없는 열매 또한 없다. 역사는 늘 아프고 서러운 사람들의 눈물을 먹고 나아가지 않았던가. 오늘에 취해 어제를 잊지 말자. 당연한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 말할 수 있고, 요구할 수 있고, 반대할 수 있고, 거부할 수 있기까지, 이름도 없이 쓰러져간 역사가 너무 많다.

 

발등이 부었다. 통증은 산발적이다. 잔당을 소탕하는 토벌군의 총성처럼 통증에는 규칙이 없다. 부은 발등은 마취된 잇몸 같다. 경직된 하루가 느리게 저문다. 굼뜬 걸음으로 양치를 하고, 찻잔을 씻고, 걸레를 빨고, 방바닥을 훔친다. 훔쳐낸 방바닥에서 머리카락이 묻어난다. 걸레를 털고 떨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쓸어 담는다. 시든 머리카락에는 감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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