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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의 하늘의 창(窓)] “국가”라는 괴물을 퇴치할 “시민권력의 시대”를 꿈꾸며

 

- 《지금 우리 학교는》 그리고 “세월호”

 

 

불평등은 빈부의 불평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다. 권력의 불평등이 그 뿌리다. 이걸 직시할 때 자유와 평등의 세상이 온다. 자유는 평등의 원리에서만 자라나는 나무이기 때문이다. 권력의 불평등이 감추어진 곳에서 자유는 부당한 현실에 저항할 수 있는 권리조차 되지 못한다.

 

남아 있는 도피처는 무력하게 고립된 개인이다. 권력이 가장 바라는 존재는 연대의 능력과 희망을 잃어버린 인간들이다.

 

“구하러 왔네.”

“우리부터는 아니야. 우린 그냥 학생들이잖아.”

 

좀비의 공격으로 교실에 숨어있던 아이들은 구조 헬리콥터가 상공을 날고 있는 것을 본다. 넷플릭스에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지금 우리 학교는》의 한 장면이다.

 

한국인들은 이 대목에서 300여 명의 아이들이 바닷속에 잠긴 “세월호”를 그대로 떠올리게 된다. 해경이 달려가 먼저 구한 것은 선원들이었다. 가라앉는 배의 창문을 절박하게 두드리며 살려달라고 하는 아이들은 현장 생중계 방송을 보고 있던 국민 모두가 보는 앞에서 죽어갔다.

 

그건 국가권력의 노골적인 방치에 의한 “살해행위”였다. 규모가 이 정도면 “학살”이라고 해도 전혀 과하지 않고 충격도 아니다. 광주 민중봉기에서 학살된 이들의 공식발표된 수와 크게 차이가 없다.

 

 

현장에서 그리고 이후에도 계속 수상한 일들이 벌어졌다. 우린 아직도 이 사건의 원인을 알지 못하고 있다. 촛불혁명의 기세로 등장했던 문재인 정부는 이 사건의 조사에 국정의 무게를 전혀 싣지 않았다. 이 또한 이해가 불가능한 태도였다. 어떤 이유로도 용서되기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거대한 세력이 관여되어 있기에 “진상의 상자”를 열면 안 되는 일인가, 라는 의혹이 생겨나기조차 한다. 더 깊게 나가면, 생존자를 살리면 안 되었던 일이었나, 라는 지점까지 가게 된다. “증언의 위험”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건이라면.... 이런 상상을 ‘음모론’이라고 규탄하는 논지 자체가 음모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은 과연 비합리적일까?

 

국가권력의 일차적 책무는 위기에 처한 국민의 생명을 구하는 일이다. 영화 《지금 우리 학교는》에서 구조대가 먼저 안전지대로 옮긴 이는 정치인이었다. 아이들은 버려진다. 그건 가상의 시나리오가 아니다. 현실에서 늘 상 보아온 바다. 국가는 그 순간 모두의 것이 아니라 소수의 특권을 지켜내는 장치라는 것이 폭로된다. “세월호”는 그런 국가의 실체가 여지없이 드러난 사건이었다.

 

 

달라진 질문, “국가권력의 해체와 시민권력의 수립”

 

2016년 대한민국의 촛불혁명은 이에 대한 분노가 도화선이었다. ‘이게 나라인가?’라며 국가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대답을 만드는 과정은 촛불혁명의 가장 큰 질문이자 과제였다. 재벌개혁도 그 질문 속에 담겨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사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막강한 특권체제가 이 문제의식을 어느 사이인가 휘발시키는 데 성공했다.

 

5년의 세월이 지난 뒤, 우리의 질문은 완전히 달라지고 있다. 국가에게 너무도 과도한 권력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누리는 것은 한이 없고 책임은 전가하는 일의 반복이다. 국민은 끊임없이 배반당한다. 국가는 국민을 보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특권을 위해 “국민들의 희생을 제도화”시키고 있다는 것도 확인되었다.

 

 

특히 검찰권력과 사법부의 전횡은 그걸 여실히 보여주었다. 어느 특정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 특정 세력이 차지한 조직 전체의 권세가 작동하는 현실이다. 국민은 그 앞에서 무한히 작은 존재, 아니 미물(微物) 그 자체다.

 

이제 우리의 주제는 “괴물이 된 국가의 해체와 시민권력의 수립”이다. 특권의 요새가 된 국가는 허물어져야 하며, 본래 권력의 주인인 시민들이 자신의 것을 다시 찾아와야 한다. 민주주의의 직접 통치가 절실해졌다. “시민권력의 지배”는 이제 물러설 수 없는 우리 모두의 최전선이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고 하지만 실상은 주권자를 한없이 무력하게 만드는 국가권력 앞에서 우리는 매일 절망하고 있다. 권력은 국민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그건 말뿐이다. 법과 현실의 괴리가 이토록 차이가 나는 조문(條文)이 있을까?

 

 

국민은 특권을 유지시키는 국가기관의 지배자를 뽑는 일에 단지 동원될 뿐이다. 선거가 끝나면 국민은 주권자가 아니라 지배받는 존재로 순식간에 격하된다. 헌법 제1조는 현실에서 명백한 허구다. “선거의 권리가 있다고 자신이 자유롭다는 착각을 하지 말라”는 루소의 경고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건 자신을 다스릴 귀족을 선출하는 권리에 그칠 것이라는 경고 역시 내버릴 수 없다.

 

“국가”는 정부만을 뜻하지 않는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3권분립”으로 분류된 권력기관 모두를 포괄한다. 정부와 의회, 그리고 사법부는 강제력을 가진 권력기구다. 이들은 국민에게 명령을 내릴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 그에 따라 시민의 자유는 극도로 제한될 수 있다. 물론 국가를 통해 우리는 보호받고 우리의 요구를 관철시킬 수 있다. 주권자들이 자신의 자유를 제한하면서까지 국가에게 권력을 내어주는 이유다.

 

그러나 그건 이제 대단히 위험한 짓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국가가 거대한 철벽 요새”라는 것이 우리의 일상적 경험이기 때문이다. “국가는 폭력을 합법적으로 전유한 기관”이라는 막스 베버의 규정은 국가가 기본적으로 폭력의 실체이며 그 폭력은 “합법”, 그러니까 그렇게 정당화하기에 따라 달려 있다는 뜻이 된다는 걸 내다보게 한다.

 

“합법”이 “정당성”을 자동적으로 보장하지 않는다. 합법과 정당성에 모순이 생기는 순간 정의는 무너진다.

 

군대와 경찰이라는 거대한 폭력기구가 존재하는 까닭도 합법의 토대 위에 있기 때문이지만, 그것이 언제든 시민을 공격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역사의 체험적 진실이다. ‘폭력시위와 과잉진압’의 미디어 문법은 허용되지만 ‘과잉시위와 폭력진압’의 미디어 문법은 위험시되는 까닭 또한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국가의 폭력독점”은 신성하다고 정해져버렸기 때문이다. 그건 모두의 안전을 위한 수칙이기에 성역(聖域)이다. 국가라는 괴물을 위해 바쳐진 ‘정치신학의 국가론’이다. 폭정에 대한 저항은 있을 수 있으나 국가 자체에 대한 저항, 그러니까 무정부주의라고 번역되는 아나키즘은 근본적으로 핍박의 대상이다. 주권자 시민(인민)은 이렇게 국가 앞에서 존엄이 사라지는 졸(卒)이 된다.

 

 

요새가 된 국가, 각기 독자적 특권이 된 3권분립

 

크로포트킨이 선명하게 정리해낸 아나키즘(Anarchism)은 무정부적 혼란(chaos)을 조장하는 이념이 아니라 국가주의에 대한 반기이다. 그와 동시에 주권자 시민과 그 시민의 협동적 연대야말로 바로 진정한 성역(聖域)임을 선포한 사상이다. 국가와 시민, 어느 쪽이 그 어떤 정치이론과 사상에서도 중심이 되어야 할지는 민주주의 체제에서 결코 착각할 수 없다.

 

괴물이 되고 만 국가의 현실을 보자. “3권분립”이라는 틀은 이들 3권의 권력을 각자의 영역에서 “요새화”해버리고 말았다. 정부는 문을 걸어 잠근 자기들만의 강고한 관료체제의 진지다. 민의(民意)의 전당이라는 의회는 직접 민주주의를 차단하는 대의제의 철갑 속으로 숨어들었다. 사법부는 그야말로 요새 중의 요새다.

 

이들 권력기관에 대한 시민의 위상은 어떤가? 3권으로 분화되어 독자적 특권이 된 각 기관의 결정에 대한 존중, 그러니까 사실은 굴복/복종으로 일관된다. 그렇지 않으면 개인들이 그나마 향유하고 있는 시민권 자체가 위협받게 된다. 정치기본권을 갖지 못한 교육 공무원 교사들의 현실은 민주정(民主政)에서도 “천민집단(pariah)”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기본권을 주장하는 자체가 불법이 된 현실은 권력의 불평등이 제도가 된 비극의 단면이다.

 

이들 3부의 권력은 시민들의 고통과 호소 앞에서 철벽이다. 3부의 권력자들을 시민들이 만나 소통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다. 그에 더하여 선출되지 않은 권력도 시민을 지배한다. 권력의 불평등이 제도로 정착된 곳에서 민주주의는 구조적으로 작동되지 않는다. 광장에서 시민들이 힘겹게 모이고 또 모이고 해야 겨우 의사전달을 받았다는 통보를 듣게 되는 수준이다. 이런 현실을 언제까지 견뎌내야 하는가?

 

어디 이뿐인가? 3권의 제도 밖에 있는 제4부의 권력이라고 불린 언론은 이 나라에서 더 이상 자유를 지키는 등대가 아니라 특권동맹을 방어하는 프로파간다 공작기관이다. 언론은 특권세력이 지배하는 국가기관의 신체가 되어버렸다.

 

이들은 서로 견제하며 균형을 갖는 것이 아니라 동맹의 특권을 즐기고 있으며, 시민의 직접 지배는 도처에서 원천적으로 막혀 있다. “특권동맹”이 민주주의의 옷을 입고 실제로는 군주제를 시행하고 있는 중이다.

 

선거는 그래서 군주의 선출로 귀결된다. 권력의 총량을 선거 한 번으로 결정하는 정치적 도박이 민주주의의 꽃으로 치장되는 이 끔찍한 상황은 종식되어야 옳다. 더군다나 이성을 능멸하는 광기가 번지면 권력의 총량 이전(移轉)은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고 만다.

 

 

"리바이던”을 넘어, “시민독재(demos-kratia)”로

 

다른 원리가 절실해졌다. 정부는 '시민의 정부'가 되어야 하고 의회는 '민회(民會)'가 되어야 하며 사법부는 '시민법정'이 되어야 한다. 이와 함께 '시민언론'이 중심에 서야 한다. 이성의 힘을 신뢰하는 민주적 가치의 주체인 “시민권력의 지배”가 아니고서는 이런 모순을 돌파할 수 없다.

 

 

1651년에 토마스 홉스의 『리바이던(Leviathan)』이 출간된다. 절대권력 체제를 하늘이 내린 권한이라고 우기던 중세 정치신학과는 달리, 인민주권의 토대 위에서 계약으로 성립된 것이라는 주장이 담긴 책이었다. 영국의 내전 상태를 경험했던 현실에서 시민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보장할 수 있는 권력의 절대적 헤게모니가 이렇게 정당화되었다. 권력자들은 열광했다.

 

 

그러나 국가권력은 "리바이던"이라는 말대로 하나의 괴물이다. “인민의 동의”라는 근거를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시민권력을 말살시키는 현실은 뒤엎어야 마땅하다. 루카치의 제자 이스트반 메스자로스(Istvan Meszaros)의 『리바이던을 넘어(Beyond Leviathan)』는 자본과 국가권력의 동맹이 구조화시킨 권력의 불평등 체제에 대한 근본적 비판을 펼친다. 마르크스의 소외론으로 저명해진 그의 정치학 이론인 “시민 소외론”이 되겠다.

 

 

그 논지는 명확하다. 국가권력의 중심을 해체하고 시민권력의 자율성을 강화하는 혁명적 변화에 대한 선언이다. 베네수엘라 혁명을 이끈 차베스는 이스트반 메스자로스의 이론을 현실에서 관철시키기 위해 진력을 다했다. 그는 특권세력의 서식처인 기존의 의회를 해산하고 사법부에 대한 대수술을 감행했다. 정부에는 민중들의 대표자가 들어서도록 했다. 특권세력의 반발은 필연적이었고 민중은 환호했다.

 

“독재화된 국가의 권력을 해체하고 시민권력으로 분산시켜, 각 지역과 공동체의 자율성을 최대한 확보한다. 이로써 변방의 권력이 자신의 주체성을 회복하는 경로가 혁명이다.”

 

차베스의 죽음으로 베네수엘라는 이 혁명의 지속적 동력을 일정하게 상실해버리고 말았지만, 권력의 소재가 3부가 아니라 민회이며 시민법정이고 시민정부가 되는 길을 예시했다. 그러나 차베스는 한국사회에서 끊임없이 왜곡되고 짓밟힌다.

 

 

금세기의 위대한 사상가인 이스트반 메스자로스는 차베스 혁명을 대자본에 장악된 국가권력을 시민에게 돌려줄 탁월한 모델로 주목했다. 현실에서 차베스는 정치적 순교자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에 대한 진실은 매장되고 지배권력이 관리하는 역사는 그를 이단자, 독재자로 기억하도록 만든다.

 

특권세력이 장악한 국가권력을 압도할 수 있는 시민권력의 지배는 혁명적 독재의 수준에 이르기까지 가야 진정한 변혁이 가능해진다. 특권세력에게는 독재요, 시민들에게는 해방의 권력이다. 지난한 길이다. 그러나 주인과 노예가 사라지는 세상은 그렇게 온다.

 

특권세력은 밤낮으로 자신들의 독재, 전제정치를 관철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이는데 착한 시민들은 “시민의 독재적 지배가 민주주의(demos-kratia/democracy)의 본령”이라는 것조차 모르고 있다. 민중(demos)의 “지배(kratia)”는 ‘배타적 권력의 행사’다.

 

이 무지에서 깨어나는 것이 민주주의 정신의 출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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