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4 (토)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인천 섬을 가다 - 66. 옥죽동 사구(Sand dune)와 대청도 사람

선사유적의 존재 가능성을 중심으로

 ▶ 사구와 사람

 

‘장산곶 북쪽에 금사사(金沙寺)가 있고, 바닷가 이십 리 거리가 모두 모래 언덕이다. 모래가 아주 잘아 금빛 같으며 햇빛에 비치어 반짝인다. 매양 바람에 따라 모래가 쌓여서 산봉우리처럼 되는데, 높아지기도 얕아지기도 하며 아침저녁으로 위치가 옮겨져서 혹 동쪽에 우뚝했다가 서쪽에 우뚝하고, 갑자기 좌우로 움직여서 일정한 방향이 없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중환의 ‘택리지’ 황해도편의 일부 내용이다. 대청도에서 얼마 멀지 않은 장산곶을 돌아가면 곧장 나오는 황해도 용연 몽금포 해안 일대의 사구를 표현한 글이다. 사구를 구성하는 금빛 모래알갱이, 바람이 부는 데로 쌓이는 부정형 사구의 천태만상, 자연이 빚은 예술작품은 바람의 방향과 세기만 알린 채 또 다른 얼굴로 등장한다. 마치 사구가 조성되는 전반적 모습은 과거 대청도 옥죽동 사구를 반추해 준다.

 

대청도 북동쪽의 ‘한국의 사하라’라고 불리는 옥죽동 사구. 백령‧대청 국가지질공원을 구성하는 10곳 지질명소 중 하나인데 국가지질공원 홈페이지에는 ‘국내에 존재하는 해안사구 중 그 규모가 매우 큰 편에 속하는 해안사구로 현재는 방풍림 조성으로 규모가 줄었지만 예전에는 축구장 60개 규모를 자랑했다. 바다에서 몰려드는 모래가 바람에 날려 조성됐으며, 이 모래들은 과거 옥죽동뿐만 아니라 산을 너머 답동까지 모래가 밀려들었을 정도로 활동성이 강했으나 현재는 방풍림 조성으로 활동성이 많이 줄어들었다’고 안내하고 있다.

 

이렇듯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사구는 지역 주민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대청도에서는 ‘모래 서 말은 먹어야 시집 간다’는 속담을 비롯해 옥죽동 모래가 타고 넘었던 검은낭큰산, 과거 배진포로 넘어가 논골(답동) 초등학교를 다닐 때 가는 모래에 발이 푹푹 빠져 걷기 힘들었던 한 많은 ‘모래 고개’, 심지어 배진포의 역사 깊던 옛 대청초등학교가 모래에 묻혀 인력으로 손쓸 수 없게 되자 내동으로 옮겼다는 전설 같은 사실은 바람과 모래의 위력이 얼마나 컸는가를 알려주며, ‘한국의 사하라’라 불릴만한 당위성을 두텁게 해준다. 금사사는 묻히지 않았지만 학교를 옮기게 한 옥죽동 사구를 이중환이 봤다면 뭐라 썼을까?

 

▶ 옥죽동 사구와 선사유적 관련성

 

해안가에서 의식주를 해결했던 선사시대 옥죽동 사람은 없었을까? 옥죽동 사구와 선사유적과의 관련성은 두 가지 질문에서 비롯된다. 첫째, 서해 각 섬마다 대부분 선사유적이 해안가에 분포하고 이웃한 백령도 해안에도 존재하는데 대청도는?

 

둘째, 대청도의 입지가 좋은 해안가 옥죽동 일대, 선사 유적의 존재 가능성이 크지만 모래에 의해 묻히지 않았을까?에서 비롯된다. 코지마 요시타카는 일본의 경우도 승문시대(조몽시대)부터 사구를 이용한 인간의 거주가 있었다고 말한다.

 

옥죽동 사구의 연구를 토대로 옥죽동 선사유적의 가능성을 알아보자. 서해안 사구는 보통 기반암이나 모래톱(Sand bar) 위에 형성되며, 탁월풍의 방향과 일치하는 경향을 갖고 있다고 한다. 일례로 서산지역 일대의 사구를 보면 현생 사구 아래에는 암갈색 내지 암황색의 고결도가 높은 사구층이 발견되는데, 퇴적물의 공급원도 현생 사구와 차이가 있는 것이며 홀로세(Holocene) 초기의 사구로 추정하고 있다.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듯 옥죽동 사구는 최소 5000년 전부터 성장했고, 바람에 의한 모래 퇴적은 700년 전에 있었다고 한다. 또 이웃한 백령도 가을리에서도 최근 고(古)해안사구 조사가 이뤄져 상부는 7000여 년 전부터, 하부는 최소 8만 년 전에 이르기까지 오랜 기간 형성됐다는 연구가 있어 인천 섬 사구에서의 고사구층의 존재 가능성은 매우 크다.

 

따라서 서해 연안이든 섬 지역이든 사구 조성 환경이 유사했기 때문에 고사구가 조성됐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며, 이 시간대는 홀로세로서 대부분 신석기 시대에 해당한다.

 

옥죽동 사구를 비롯한 대진동, 농여, 미아동 해변 등 해안사구에는 선사시대 인류의 존재가능성이 매우 크며 아마 현생 모래에 사몰(沙沒)됐을 것이다. 백령·대청 국가 지질공원이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서의 인증을 위해서라도 고고학 연구가 동반돼야 할 것이다.

 

사적지인 강원도 양양 손양면의 오산리 유적. 8000년 전에 신석기 사람들의 물고기잡이, 사냥, 채집 등 경제 활동과 집을 짓고 살림했던 움집이 발굴된 우리나라 대표적 유적. 이곳의 지형도 해안사구이기에 옥죽동 사구에 강한 시사점을 준다.

 

메소포타미아의 ‘기름진 초승달 지역’이든 옥죽동 사구 같은 모래밭 지역이든 환경을 가리지 않고 인간의 생명과 삶은 그 시대 상황 속에서 인동초처럼 적응하며 이어져 왔다./ 김석훈 백령중고 교·인천섬유산연구소 이사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