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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갑의 難讀日記(난독일기)] 무명(無名)이라 부른다

 

 

노래하는 것들에게는 이름이 없다. 강을 노래하는 물결이 그렇고, 숲을 노래하는 그늘이 그렇고, 봄을 노래하는 햇살이 그렇다. 사람에게는 있는 저마다의 이름이 강과 숲과 봄을 노래하는 것들에게는 없다. 밀고 밀리는 물결들마다, 덮고 덮이는 그늘들마다, 비추고 부서지는 햇살들마다, 붙여져야 마땅할 저마다의 이름이 없다. 사람 사는 세상도 그와 같아서, 노래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름이 없다. 글이든 그림이든 음악이든 무엇이든, 틈을 열고 틈 너머를 노래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름이 없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무명(無名)이라 부른다.

 

문학이든 미술이든 음악이든 연극이든 상관없다. 사람을 노래하든 세상을 노래하든 달라지지 않는다. 노래하는 것이 전부인 사람들에게는 이름이 없다. 호봉도 직급도 계급도 없다. 월급도 휴가도 보험도 정년도 없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일까. ‘싱어게인, 무명가수전’이라는 오디션 프로그램에 시청자들의 눈길이 쏠렸다. 오디션에 참가한 무명가수들은 이름표 대신 번호표를 달고 심사위원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부르는 노래의 깊이와 색깔과 맛깔스러움에 따라 심사위원들의 선택이 갈렸다. 갈리는 승패에 따라 시청자들의 탄식과 환호 또한 서로 갈렸다.

 

탈락한 무명가수들은 참가번호 대신 이름을 밝히며 무대를 떠났다. 탈락과 생존의 반복 속에서 무명가수들은 차례로 유명가수가 되었다. 어쩌면 그것이 높은 시청률의 원인이었는지 모른다. 무명(無名)에서 벗어나 유명(有名)이 되는 것. 없던 이름을 당당히 찾아내는 것. 깨닫든 깨닫지 못했든 그것은 시청자들의 바람이기도 하였으니까. 생각해 보자. 자신의 이름으로 온전히 불리며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주민등록에 등재된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지. 하루에 한 번이라도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이 있기는 하는 건지.

 

그리 보면, 사람도 사람 밖의 영역에서 노래하는 것들과 다를 게 없다. 강을 노래하는 물결과, 숲을 노래하는 그늘과, 봄을 노래하는 햇살처럼, 꿈과 소망을 노래하는 무명 동물일 뿐이다. 사람이라는 틀 속에는 내가 없다. 소비자나 시청자는 있어도 나는 없다. 내가 없는 자리에는, 이름 대신 다른 무언가가 있다. 납세자가 있고, 유권자가 있고, 청년과 노인이 있고, 주부와 학생이 있다. 인종과 국적과 성별과 종교와 혈연과 출신과 직업과 형편에 따라 나 아닌 다른 무언가가 있다. 어미와 아비가 있고, 아내와 남편이 있고, 딸과 아들이 있다.

 

그러함에도, 기꺼이 이름을 버리고 국민으로 불리고자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나를 버리고 우리가 되어야 비로소 세상이 열린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참된 ‘가치’는 너와 내가 ‘같이’ 하였을 때 빛을 발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국민이 아는 걸 정치하는 사람이 모를 리 없다. 알면서도 모른 척 하는 것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트럼프를 흉내 내지 마라. 청년들을 부추겨서 차별과 혐오를 조장하지 마라. ‘이대남’과 ‘이대녀’로 갈라서는 대한민국에는 미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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