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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준의 경기여지승람(京畿輿地勝覽)] 50. 몽오산인(夢梧山人) 김종수(金鍾秀)

 


 
몽오산인(夢梧山人)은 청백리 김종수(金鍾秀, 1728~1799)의 별호이다. 몽오산은 김종수의 청풍 김씨 선산이 있던 곳으로 현재 서울 몽촌(夢村)과 오금동(梧琴洞) 지역이다.
 
몽촌은 옛날 삼한시대에 ‘검마을’ 또는 ‘곰말’이라고 불렀다. 곰의 음이 꿈으로 변해서 ‘夢村’이 되었다. 이는 백제가 도읍을 옮긴 ‘웅진(熊津)’ 또한 ‘곰나루’라는 점에서 상호 관련이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 지역의 다른 지명으로 ‘고원강촌(古垣江村)’이 있는데, 옛날에 흙으로 쌓은 담장이나 성루가 있었다는 뜻이니, 몽촌토성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곰은 큰 것을 의미하므로 ‘곰말’은 큰 마을, 으뜸가는 마을이라고 풀이된다. 고원(古垣)은 ‘옛울’이라는 뜻이고 울타리라는 의미를 가진 ‘위례(慰禮)’와 의미가 통한다. 오금동의 유래는 병자호란 때 인조가 피난을 가던 중 백토고개에 이르러 다리오금이 저려오고 신세가 한스러워 "아이고, 오금이야"라고 해서 이 마을을 ‘오금골’이라 불렀다고도 하고, 오동나무가 많아서 가야금 만드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김종수는 세손 시절 정조(正祖)의 스승으로 정조임금의 특별한 신임을 받았다. 좌의정을 역임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봉조하는 퇴직한 관료에게 준 명예직으로서 평생 동안 신분에 맞는 급여를 주면서 실무는 보지 않고 다만 국가의 의식이 있을 때에만 조복(朝服)을 입고 참여하였다.

 

 
김종수가 평양감사로 부임할 때는 정조임금이 시를 지어 주고 술을 권하면서 시의 내용에 술을 경계하는 내용이 있는데 "지금 술을 권하는 것은 내가 경으로 하여금 술을 끊게 하려는 뜻이 아니라, 곧 절제하여 마시도록 경계하는 것이다" 하였다.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 여러 고을의 수령과 관리들이 연광정(鍊光亭)에서 송별연을 베풀고 대동강에 배를 띄우고 놀았는데, 김종수는 흥에 겨워 담뱃대로 뱃전을 두드리며 적벽부(赤壁賦)를 불렀다. 그 때 담뱃대가 부러지며 끝의 쇠붙이가 강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러자 김종수는 웃으며, "내가 3년 동안 평양에 있으면서 선물 받은 물건이라고는 담뱃대 하나 뿐 인데, 대동강 귀신은 그것마저 가지고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구나" 하면서 남은 부분도 강물에 던져버리고 말았다.

 

 
정조임금이 지어 준 김종수의 별명은 돌올공탕서주인(突兀空蕩墅主人)이다. 정조는 김종수에게 "급하게 자취를 보면 돌올한 듯하지만, 자세히 마음을 따져보면 실로 텅비었다"라고 평가한 바 있다. 돌올하다는 것은 높이 솟아 우뚝하다. 두드러지게 뛰어나다는 의미이다. 텅비었다는 것은 김종수가 사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김종수가 세상을 떴을 때 정조임금은 그와의 관계를 "천년에 한 번 있을 법한 만남을 이루었는데, 강개하게 의리로써 자부하여 죽더라도 후회함이 없었다"고 하였다. 자신의 묘비문을 스스로 지었는데, 벼슬 이름조차 쓰지 않고 자신의 호인 몽오산인(夢梧山人)이라고 새기는 한편, 검소하게 장례를 치르도록 유언하였다.

 

 
김종수의 묘가 하남시 광암동 정수장 뒷산 정림(靜林, 井林)에 있었는데, 2015년 봄에 의왕시 고천동 산31번지로 이장하였다. 정림은 이 마을에 물맛이 좋은 샘물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성남 복정동에 정수장이 생기고, 하남 정림에 광암정수장이 생긴 것이 우연은 아닌 듯 하다.

[ 경기신문 = 김대성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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