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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호찌민의 관저

 

 

지난 5월 19일은 베트남의 정신적 지주인 호찌민이 태어난 날이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지 53년이 지났지만 바딘광장에 있는 그의 영묘에는 참배객들의 줄이 끊어지지 않는다.

 

호찌민에 관한 글을 여러 번 쓴 적이 있는 내게 베트남통신사에서 인터뷰 요청이 왔다. 한국 작가로서 호찌민이 지닌 가장 큰 가치와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첫 번째 질문이었다. 나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호찌민은 자신의 말과 행동이 완전히 일치한 사람이었다. 인민을 위한다는 지도자는 많았지만 인민을 위해 산 지도자는 매우 드물었다. 호찌민은 그 드문 지도자 중에서도 매우 특별했다.”

 

내가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베트남에서 살았던 여섯 개의 집에 모두 가보았기 때문이다. 그가 태어난 응애안의 작은 시골집은 베트남의 전형적인 농가다. 베트남의 최고액권인 50만 동 지폐 뒷면에 찍힌 야자나무 지붕의 소박한 바로 그 집이다.

 

내가 가본 호치민의 두 번째 집은 베트남 남부에 있는 해변도시 판티엣의 야간학교였다. 그는 베트남을 떠나기 전에 늑맘(젓갈)생산지로 유명한 판티엣의 젓갈공장 부설 야간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내가 오래전 비 오는 날 산길을 달려 찾아갔던 베트남 북동부 산악지대의 곡보 동굴은 해외를 떠돌며 독립운동에 매진했던 호찌민이 31년 만에 돌아와 ‘베트민’ 강령을 작성하고 무장선전대를 만들었던 곳이다. 계곡 깊은 동굴 안에 있는 차가운 바위가 그의 침대였고 집무실이었다.

 

그가 살았던 다른 세 개의 집은 하노이의 주석궁 안에 있다.

 

1945년 9월 2일 독립 선포와 함께 출범한 베트남민주공화국의 주석으로 추대된 그는 프랑스와 일본이 총독부로 썼던 주석궁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는 주석궁 안에 있는 총독관저의 사용을 끝내 거절했다. 그가 선택했던 관저는 다섯 평 남짓한 총독관저의 전기기사가 사용했던 작은 집이었다.

 

‘가족도 없는 내게 이보다 큰 집이 왜 필요한가.’

 

총독관저를 뿌리치고 전기기사의 집에 사는 호찌민을 위해 정부에서 기어코 새로운 관저를 짓겠다고 들고 온 설계도를 다 물리치고 그는 10평 남짓한 두 칸짜리 집을 짓게 했다. 그가 활동했던 산악지대에 살았던 소수민족인 눙족의 전통가옥 형태였다. 그는 그 집에서 아이들을 만나고 외국 국빈을 만났다. 북한의 주석이었던 김일성도 그 집에서 만났다.

 

미국과 전쟁 중에도 그는 열 평짜리 관저를 지켰고, 그가 고령과 과로로 몸져누웠을 그의 참모들은 그를 바로 뒤에 있는 작은 단층집으로 모셨다. 나는 그가 최후를 마친 바로 그 집에서 그의 최후를 찍은 비공개 필름을 보았다. 눈을 감은 그의 머리맡에서 비통한 눈물을 훔치던 보 응웬 잡 장군과 팜 반 동 총리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그가 살았던 열 평 남짓한 관저 남긴 재산은 책 몇 권이 전부였다. 한때 모든 것을 가졌지만 멸시 속에 떠나간 지도자는 역사에 참으로 많았다. 호찌민은 아무것도 가지지 않음으로써 모든 것을 얻을 줄 알았던 참으로 드문 지도자였다. 오래 만나지 못한 베트남의 친구들과 함께 그의 132회 생신을 경하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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