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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의 하늘의 창(窓)] 영미귀축(英美鬼畜)과 일본의 대동아공영권 그리고 오늘

 

- 발틱함대와 일본 해군

 

“두 줄로, 마치 바둑돌을 나란히 놓는 것처럼 저렇게도 정연하게 대오를 짤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 그 함대의 위용을 본 놀라움은 지금도 온몸에 남아 있어.”

 

 

러-일 전쟁의 최후결전 쓰시마(對馬島) 해전(海戰) 장면을 목격했던, 이제는 80살의 노인이 된 이의 증언이라며 일본의 이른바 국민작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郞)가 기록한 대사다. 러시아의 세계 최강 발틱함대와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가 이끄는 함대의 격돌 직전의 장면이다. 이는 그가 쓴 『언덕 위의 구름(坂の上の雲)』의 한 대목으로 국내에서는 1979년 『대망(大望)』이라는 장편 시리즈의 35권에서 37권으로 번역되어 꽤나 읽혔다.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가 육군의 신이라고 한다면 도고 헤이하치로는 해군의 신이라 불렸던 자다.

 

 

이 작품은 명치유신 이후로부터 러-일전쟁 승리까지 다룬 역사소설로 일본의 해군력 증강의 과정을 보여준다. 이 해전의 승패가 일본의 미래에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인지에 대해 시바 료타로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일본 역사를 어떻게도 해석하고 논할 수도 있겠지만 일본해를 지키려는 이 해전에서 일본 측이 졌을 경우 그 결과에 대한 상상만은 한 가지 밖에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일본도, 그 후의 오늘날의 일본도 존재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그 틀림없는 개연성은, 먼저 만주에서 잘 싸우고 있으면서도 결과적으로 전력(戰力)을 소모하고 있는 일본 육군이 단번에 고군(孤軍)의 운명에 빠져 반년도 못가 전멸하고 말리라는 것이다.”

 

시바 료타로의 소설은 일본국민들의 근현대사 정신을 형성할 정도로 영향력이 막강하다. 그런 작가의 역사관은 이렇게 러-일 전쟁을 통해 일본의 존재 자체가 판가름난다고 보고 있는 동시에 조선에 대한 일본의 지배문제는 짚지 않는다. 시바 료타로 문학의 결정적 문제이다.

 

이어지는 대목은 그래서 이렇게 되어 있다.

 

“(일본이 항복하게 된다면) 전국이 러시아 영토가 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최소한 쓰시마 섬과 함대 기지인 사세보(佐世保)는 러시아의 조차지(租借地)가 될 것이고 홋카이도(北海島) 전역과 지시마(千島) 열도는 러시아령(領)이 되리라는 것은, 그 당시 국제 정치의 관례로 보더라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물론 동아시아 역사도 그 후와는 다른 것이 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만주는 이미 개전 전에 러시아가 사실상 주저앉아 버린 현실이 그대로 국제적으로 인정될 것이고, 또 이씨 조선도 거의 러시아의 속국이 되어 적어도 조선의 종주국이 중국에서 러시아로 바뀌었을 것이 틀림없으며, 더 말하면 일찍부터 러시아가 눈독을 들이고 있던 마산항 이외에 원산항, 부산항이 조차지가 되고 인천 부근에 러시아 총독부가 출현했을 것이라는 상상을 막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이런 이후 일본이 조선에 총독부를 세워 지배하게 된 것은 다행이라는 뜻인가? 그런데 그가 묘사한 발틱함대와의 해전에서 이 함대가 그가 말하는 일본해, 우리의 동해까지 어떻게 오게 되었는지 설명이 없다.

 

“발틱함대는 거의 여덟 달을 항해했다. 발틱해에서 빠져나와 유럽을 거쳐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양을 건너 그제야 일본함대와 마주하게 되었던 것이다.”

 

 

월터 라페버(Walter L Feber)가 기록한 미국과 일본의 역사, 그 한 대목이다. 이미 오랜 항해로 지쳐 있는 발틱함대와의 대치였던 걸 시바 료타로는 빼놓은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전쟁의 구도는 일본과 러시아, 일대일(一對一) 대결이 아니었다. 우리에게는 1905년 일본에게 한반도의 관리 권한을 인정한 미국과 일본 사이에 있었던 ‘태프트-카츠라 비밀거래’로 알려진 카츠라 타로(桂太郎) 총리대신은 하바드에서 공부한 고무라 주타로(小村壽太郎)를 외상으로 임명하게 된다. 고무라는 1902년 영국과 비밀협약을 맺어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았으며 미국과도 러시아 방어전이 아시아에 러시아의 영향력을 막기 위해 필요하다는 이해를 구했고, 미국은 세 번에 걸쳐 모두 1천만 달러에 가까운 전시(戰時)채권을 뉴욕 월스트릿트를 통해 일본에게 확보하도록 해준다.

 

영일비밀동맹과 미국의 지원이 러-일전쟁의 뒷배였으며 이는 오로지 조선에 대한 지배를 목표로 한 국제관계의 정비였다. 고무라가 당시 미국의 씨오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과 존 밀턴 헤이(John Milton Hay) 국무장관에게 대(對)러시아 방어전의 의미를 강조하면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이해를 설파했을 때 이를 옆에서 거든 자가 있었으니 그는 선교사 출신으로 고종의 정치고문이자 주한미공사로 있던 호레스 알렌(Horace Allen)이었다. 그는 미국에게 광산, 철도, 전등의 권리를 넘겨주는데 일익을 담당했으며 그 자신도 운산광산(雲山鑛山)의 주인이기도 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조선인들은 자치 능력이 없다. 따라서 일본인과 같은 문명개화된 인종이 이 나라를 넘겨받아야 한다.”

 

물론 그건 조선의 시장이 미국에게도 개방되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나 도대체 고종이 누구를 자신의 정치고문으로 옆에 두고 있었던 것인지 기가 찰 노릇이다.

 

- 미국의 ‘태평양 시대’

 

 

그런데 이 당시 루즈벨트는 미국이 이제 ‘태평양의 세기(Pacific Century)’로 진입하게 되었다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도 이런 말에 귀를 기울이는 요인이 되었다. 그는 그렇지 않아도, 문명의 풍향이 점차 서쪽으로(유럽에서 보면 콘스탄티노플에서 드디어 영국 런던을 거쳐 미국)이동한다는 브룩스 아담스(Brooks Adams)의 역사이론과 해군장교 출신으로 해군사(海軍史)의 태두(泰斗) 알프레드 테이어 마한(Alfred Thayer Mahan)에게 깊은 영향을 받았다. 브룩스 아담스의 증조부 존 아담스(John Adams)와 조부 존 퀸시 아담스(John Quincy Adams)는 모두 미국 대통령을 지낸 명문가라는 점에서도 그의 영향력은 매우 컸다. 또한 마한의 저서인 『역사에서 해상세력의 영향력(The Influence of Sea Power upon History: 1660–1783)』은 지금도 읽히고 있는 해군사의 고전이다.

 

씨오도어 루즈벨트는 이런 분위기와 미국 자본주의 발전 과정의 단계로 볼 때, 그 역량은 이제 태평양을 미국의 바다로 장악해서 아시아로 미국의 힘을 진출, 확대시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시대적 임무이자 미국의 위상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1848년 멕시코와의 전쟁에서 텍사스와 캘리포니아를 미국령으로 획득한 이후 당시 서구세력 최대의 관심사였던 중국과의 무역에 캘리포니아는 텍사스에 비해 20배 이상의 가치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 미국 내 평가였다. 당시 미 재정부 장관 로버트 워커(Robert Walker)는 “태평양으로 가는 진로가 확보되면서 아시아는 우리의 이웃이 되었다. 이제 아시아와의 무역은 유럽 전체를 합쳐도 훨씬 클 것이다”라고 장담했다.

 

이런 상황을 전후로 해서 하와이의 가치 또한 새롭게 주목되기 시작했다. 애초에는 포경선의 중간 기착지, 이후에는 사탕수수 그리고 나중에는 함대의 중간기착지 내지 기지로 그 가치가 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멕시코와 전쟁이 끝난 다음 남북 전쟁과 연방정부 통일, 동서 철도 건설 등으로 대외정책의 추진속도가 지연되다가 거대 독점자본의 등장과 함께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스페인 식민지였던 쿠바와 필리핀을 장악하게 된 것은 보다 본격적이고 구체적인 태평양 전략을 수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의 개국과 1868년 명치유신(明治維新)으로 이어진 1853년의 미국 전함 페리(Perry)호 출몰은 바로 이런 미국의 태평양 체제의 전조(前兆)였다. 이 시기 미국의 대일본 전략이 군사적으로 강력하게 추진되지 못했던 까닭은 일차적 관심이 무역거래의 관계 정립이었고 미국의 해상역량이 아직 미비했으며 곧바로 남북전쟁에 휘말렸기 때문이었다. 일본은 이 시기 미국의 식민지가 될 가능성에 두려워 떨었으나 막부타도(幕府打倒)를 통한 근대개혁으로 나서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의 경로로 들어서게 된다.

 

-미국과 일본의 만남

 

 

미국이 일본과 마주하게 되는 것은 1790년부터 1853년까지는 조난(遭難)을 포함해서 주로 포경선(捕鯨船) 문제였다. 이 당시 미국의 태평양 항해의 주목적은 포경이었고 허먼 멜빌(Herman Melville)의 『모비딕(Morby Dick)』이 1851년 출간되었던 것도 이런 역사적 상황을 보여준다. 1853년 일본의 에도(江戶, 지금의 동경/東京) 앞바다에 나타난 페리 제독(提督)은 서브스퀴하나(Subsquehanna), 미시시피(Mississippi), 플라이마우쓰(Plymouth), 사라토가(Saratoga) 네척의 증기선 군함을 끌고 왔다. 일본 역사에서는 ‘흑선(黑線)’이라고 표현되는 이 군함들은 일본인들이 지금까지 보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크기에 대포까지 장착해서 에도가 공격대상이 되고 에도로 가는 보급로가 막힐 수 있는 위협이 되었다.

 

 

한도오 가즈토시(半藤一利)가 기록한 막부 말기의 역사를 다룬 『막말사(幕末史』는 페리제독의 군함을 보는 일본인들의 시선을 이렇게 기록해놓고 있다. “함대의 속도가 매우 맹렬해서 이걸 보는 것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에도 앞바다에서 도쿠가와 막부의 본영이 있는 에도에 근접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던 것이자 이를 막을 길은 없어 보였다. ‘페리호 충격’이었다. 이를 계기로 막부정치는 이미 내부의 민란과 각 번(藩)의 충성을 서서히 놓치고 있는 상황에서 결정타를 맞게 된 것이다. 한편 미국은 1854년에서 1860년 사이에 러시아와 알래스카를 놓고 협상을 벌였고 마침내 7천 2백만 달러로 구입, 알래스카를 측면으로 하는 아시아 환(環)태평양로를 확보하는 단계로 가고 있던 중이라 1858년 미국과 통상조약을 맺은 일본의 개국은 미국의 아시아-태평양 전략에 중대기로가 되었다.

 

한편, 도쿠가와 막부의 무능력과 한계가 페리호로 여실히 드러나면서 막부정치를 더 이상 끌고 나가기 어렵게 되었고 이와 함께 오랫동안 유지해왔던 쇄국정치도 그 경계선에 놓이게 된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존왕양이(尊王攘夷)”를 내세운 세력들이 막부는 타도하고 천황제는 실질적 복원을 하면서 쇄국은 견지하는 정책을 유지하자 개혁 노선에 모순이 생겼다. 그러다가 1863년 영국 함대와 격돌했던 싸스마(薩摩) 번(蕃)이 패퇴하면서 노선의 전격적 변화가 이루어진다. 서구의 근대국가 모델이 일본 개조의 기조가 되었고, 싸스마 번과 함께 막부타도를 외친 토막(討幕)세력인 초슈(長洲) 번(藩) 또한 양이(攘夷)에서 입장을 바꿔 명치유신의 토대가 만들어졌다. 참고로 싸스마는 일본열도의 남쪽 끝 해안, 초슈는 서쪽 해안으로 막부의 영향력이 잘 미치지 않았던 지역이었다.

 

 

바로 이런 정세속에서 도사(土佐)번이 중간에 개입해 들어와 무조건적 토막이 아니라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의 절충안인 “대정봉환(大政奉還)”을 내놓는다. 대정봉환은 막부 스스로가 권력을 천황에게 넘기고 열번회의(列藩會議)를 설치해서 막부의 쇼군(將軍)이 의장을 맡는 방식이었다. 그야말로 크게 수를 놓는 ‘대정(大政)’이었다. 열번회의는 결국 성사되지 못하지만 초슈, 싸스마 두 번이 대정봉환 제안으로 혼란에 빠진 막부를 공격, 교토를 장악하고 1868년 왕정복고(王政復古)를 전격 선언한다. 한편, 이에 저항하는 세력들은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그는 훗날 정한론(征韓論)을 펴다가 시기상조론을 내세운 유신주도 세력에 의해 패퇴 당한다)의 토막군(討幕軍)에 의해 정벌되고 명치유신 이후인 1869년 번(藩)의 자산을 정부에 넘기는 “판적봉환(版籍奉還)”, 이어 1871년 봉건적 번 제도를 없애고 근대 행정지역으로 만드는 “폐번치현(廢藩置懸)”으로 봉건영주의 정치적 영향력은 제도적으로 완전히 종말을 고한다.

 

-워싱턴 체제의 붕괴와 전쟁, 그리고 오늘

 

이런 과정을 거쳐 근대국가의 기초를 만든 일본은 영국 함대를 본떠 해군력 증강에 온 힘을 쏟게 되고 이것이 앞서 말했던 시바 료타로의 『언덕 위의 구름』의 소재가 된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연맹의 상임 이사국이 되고 해군력 세계 제3위에까지 오르게 된다. 해군력의 주도자 도고 헤이하치로가 명치유신의 주도세력 싸스마 번 출신이라는 점과 싸스마(폐번치현 이후로는 가고시마현/鹿児島県)는 일본 남단 해안지역이라는 점도 아울러 기억할 일이다.

 

이렇게 서구와의 관계가 밀착되다가 1921년부터 1922년까지 미국, 영국, 일본을 중심으로 워싱턴에서 해군 군비축소, 태평양과 동아시아 문제를 다루는 회의가 열린다. 이 회의의 핵심은 해군력 경쟁이 격화되면서 전쟁 가능성을 막겠다는 취지였는데 그 결과 미국/영국/일본이 각기 5:5:3으로 그 비율이 확정된다. 이와 함께 중국 문제는 어느 국가 일방의 독점이 아니라 국제적 협상과 관리를 통해 해결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미국이 주도한 이른바 “워싱턴 체제의 확립”이었다. 이 체제에서 미국은 태평양, 영국은 대서양에 집중해도 되는 것으로 세계체제가 합의되었고 일본도 내부 경제사정의 부담으로 군비경쟁의 강도를 낮추는 것에 동의하게 되었다. 하지만 중국 문제는 화약고로 남게 되었고 태평양에 집결하게 되는 미국의 해군력과 일본의 해군력이 향후 어떤 관계를 갖게 될는지는 예측 불가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로부터 10년 뒤인 1933년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그에 앞서 1931년 만주사변에 이어 1937년 중일전쟁, 그리고 결정적으로 1941년 진주만 기습으로 워싱턴 체제는 붕괴되고 아시아-태평양 전쟁이 벌어진다. 일본과 미국, 영국은 러-일 전쟁과 이후 제1차대전 때까지와의 관계는 단절되고 졸지에 일본인들에게는 영미귀축(英美鬼畜)이 되어 국가적 생존을 건 전쟁상대가 되었다.

 

 

그리고 패전, 미군정으로 이어진 미국과 일본의 관계는 오늘날 아시아-태평양 체제의 군사적 주요 파트너로 고착되고 있는 중이다. 페리호 이후의 일본과 미국, 그 적대적 개방은 이내 외교적 우호관계가 되었다가 아시아-태평양 체제를 놓고 대결했지만 그 판세가 결정되면서 이제는 미국의 주도 아래 공동관리체제로 가는 형국이다. 여기에 한국의 발언권은 아직도 잘 들리지 않는다. 태프트-카츠라의 밀거래와 호레스 알렌의 악담은 지금까지도 그 여진을 남기고 있는 모양이며 시바 료타로의 역사관은 여전히 일본을 지배하고 있다. 평화헌법 제9조는 일본의 전쟁국가화를 막고 있는 최후의 보루이나 미국과 일본의 외교는 이걸 깨뜨리기 위해 모든 역량을 집중시키고 있는 중이다. 여기에 합류하고 있는 윤석열 정권의 한국은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위태롭게 만들고 있다.

 

 

아시아-태평양전쟁은 일본에게 대동아전쟁이었고 이는 ‘대동아공영권 수호전쟁’으로 선전된다. 이제 이 대동아 공영권은 이름과 주도세력만 바뀐 채 미국의 지휘 아래 새로운 대동아 공영권 건설에 우리를 끌어들이려 하는가? 우리는 도대체 어디에 서려 하는가? 침략주의를 근본적으로 포기하지 않고 있는 이웃을 가까이 있다는 이유로만 이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제 일본의 양심적인 시민들과 손을 잡고 함께 평화로운 아시아를 만드는 노력에 진력을 다할 일이다.

 

 

해상 자위대 출신의 한 사나이에게 아베가 암살을 당했다. 아베가 강화하려한 자위대 출신의 저격이라는 점이 이 사태 앞에 마주하게 되는 일본 극우의 딜레마일 것이다. 인간의 차원에서 아베의 죽음을 애도하기에 앞서 짚어야 할 바가 참으로 많지 않은가? 그의 영정 앞에서 먼저 애도의 대상이 되어야 할 이들을 떠올리는 것이 우리의 자세가 아닐까? 애도라는 말을 그냥 쓰기에는 일본의 역사, 미국과 일본의 관계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심상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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