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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갑의 난독일기(難讀日記)] 두 번 무릎 꿇었다

 

송곳니로 물어뜯었다. 아니, 송곳니를 깊숙이 박고 나머지 이빨로 물어뜯었다는 게 적확한 표현이다. 물어뜯는 이빨의 무작스러움은 악다문 턱뼈와 흔들어대는 모가지 근육을 통해 그대로 전달되었다. 으르렁거릴 때마다 까뒤집어진 잇몸 사이로 침이 번들거렸다. 번들거리는 침에서 개 사료 냄새가 났다. 비릿한 동물성 사료 냄새에 비위가 뒤틀렸다. 도사견과 세퍼드의 잡종쯤일까. 대가리를 흔들며 물어뜯을 때마다 덩치 큰 개의 살집이 덩달아 출렁거렸다. 개는 두 개의 눈을 송곳니처럼 내 얼굴에 박고 놓아주지 않았다. 타깃이 된 나의 얼굴이 개의 눈동자에 고스란히 비쳤다.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땅끝 마을에는 드문 눈이다. 삼년 만에 내리는 함박눈이라고 했다. 첫눈치고는 소복하여서 해남 천지가 함박꽃이다. 눈꽃을 만끽하려 나섰다가 개를 만났다. 딸기농사를 하는 농장 앞이었는데, 논 가운데 하우스 몇 동을 지어놓고 있었다. 개는 열린 문틈으로 곧장 걸어 나왔다. 목줄을 하지 않은 개였다.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지만 주인은 웃으며 내게 말했다. “우리 사랑이는 사람 안 물어요.” 나는 어깨에 메고 있던 백팩을 내밀며 방어자세를 취했다. 개 주인이 다시 웃으며 말했다. “안 문다니까요.” 사람을 물지 않는다는 개는 나를 덮쳤다. 어찌나 무작스럽던지, 물어뜯는 백팩의 지퍼가 열리고 소지품이 길바닥에 쏟아졌다.

 

가시로 찔러댔다. 아니, 가시를 뼈마디 깊숙이 찌르고 쥐어짜듯 비틀어댔다는 게 적확한 표현이다. 찌르고 비틀어대는 가시의 아찔함은 속옷을 축축하게 적신 땀을 통해 그대로 전달되었다. 베개와 이불이 축축해지도록 땀을 흘렸지만 열은 떨어지지 않았다. 몸뚱이는 펄펄 끓는데 왜 춥고 떨리는 걸까. 물을 마시려고 냉장고로 기어가다 몇 번을 꼬꾸라졌다. 눈앞이 뿌옇고 두들겨 맞은 것처럼 온몸이 욱신거렸다. 지독한 독감이었다. 꿈쩍없이 사흘 밤낮을 이불에 묻혀 살았다. 까무룩 잠이 들면 돌아가신 아버지가 꿈에 찾아와 멀뚱히 내려다보았다. 거울에 비친 내 얼굴 위로 죽은 아버지의 얼굴이 겹쳐졌다. 죽음을 경계로 서로 고립된 얼굴이었다.

 

닷새 만에 방문을 열었다. 고립을 열고 나가 함박눈을 만났다. 눈으로 덮인 해남 천지는 바다를 향해 아득하였다. 마당을 덮은 눈이 발에 밟힐 때, 문득 허기를 느꼈다. 나흘 전에 집에서 보낸 택배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글을 쓰는 것도 결국 살자고 하는 짓인데. 시골에 방을 얻어서까지 궁상 떨 필요가 있을까. 뜬금없는 미움이 택배배달원을 향해 치솟았다. ‘퀵’이니 ‘총알’이니 ‘당일’ 따위의 광고문구가 미움을 키웠다. 저녁에 배송하겠다던 택배는 밤 열한 시가 되어서야 도착했다. “길이 얼어서 늦어졌습니다.” 머리 조아리는 배달원의 등 뒤로 그의 아내가 서있었다. 일손을 거들기 위한 동행 같아 보였다. “죄송합니다.” 조아리는 남편의 등을 바라보는 아내의 눈에서 금방이라도 겨울비가 쏟아질 것 같았다.

 

땅끝 마을에는 드문 눈이다. 삼년 만에 내리는 함박눈이라고 했다. 나는 해남을 덮은 은빛 결정체 앞에서 두 번 무릎 꿇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개 주인 앞에서 한 번 무너졌고, ‘고마움’도 모르는 여물지 못한 내 자신을 보며 또 한 번 무너졌다. 이 겨울, 함박눈 덮인 당신의 마을에는 무엇이 녹아내리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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