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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행 칼럼] 우리는 만나야 한다

 

 

전호근 교수(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는 『한국철학사』에서 현대철학자로 함석헌, 장일순 등 6명을 다루고 있는데 이들의 특징은 독창성에 있다. 동서양 철학의 각주가 아니라 한국적 삶에 뿌리를 내린 것이다. 일제에서 해방되어 근대를 거치지 않고 현대로 직행한 한국은 여러 모순의 집합체다. 이 모순을 끊어내려고 줄기차게 싸워왔던 게 한국 현대사의 자기정체성이기 때문에 이에 기반한 철학이 태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눈부시게 활동하고 있는 한국 현대 철학자들 중 김상봉 교수(전남대 철학과)는 "우리의 역사에 뿌리박은 철학의 형성"을 궁극적으로 지향한다. "한국의 주류 철학계가 철학을 외부에서 얻어오는 일에 골몰하여 자기로부터 새로운 보편적 세계상을 형성해내려는 시도를 거의 하지 않았다"는 반성에서 출발하고 있다. 그는 철학을 "자기 속에서 세계를 만나며 세계 속에서 자기를 만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한마디로 '만남의 철학'인 것이다.

 

김 교수는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에서 "진리는 만남에 있다"고 선언한다. 진리하면 고차원적인데다 난해한 철학적 명제로 알고 있는 이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다. 고작 사람과 사람의 부딪힘 속에 진리가 있다는 말은 얼마나 평범하며 비철학적인 것인가. 김 교수는 『서로주체성의 이념』과 대담집 『만남의 철학』에서 진리가 왜 만남에 있는가를 논증한다.

 

만남은 곧 '서로주체성'이다. 자기가 누구인가에 대한 반성적 자기인식이 주체성인데 "타자 속에서 자기를 상실하고 자기와 치명적 단절 속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주체성은 다른 주체성과의 만남이 있어야 비로소 온전한 것이 된다. 이럴 때 타자 속에서 자기상실과 홀로주체성을 치유하고 극복할 수 있다.

 

만남의 철학은 한국 현대사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 어떤 철학보다 현실적·구체적이라고 할 수 있다. 김 교수는 한국 사람들이 모순과 맞서 세계사에 전례가 없을 정도로 잘 싸웠지만 민주주의를 꽃 피우지 못한 한계가 있다고 본다. 그 까닭을 생각 없음, 정신의 빈곤에서 찾는데 스스로 생각하는 일에 게으른 나머지 권력이 주어졌을 때 설계도도 없이 남이 만들어놓은 세계상에 의존해 실패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멀리 갈 것 없이 작금의 정치를 보자. 한국 현대사의 모순에 맞서 싸웠던 당사자들과 지지자들이 적지 않은 민주당에 세계상이 과연 있는가? 세계상은 고사하고 온갖 위험한 사법 리스크를 안고 있는 당대표에게 쓴 소리 하는 사람조차 없는 상황이다. 저런 당대표 앞에서 침묵하는 것이야 말로 정신의 빈곤 아닌가. 주체성과 서로 주체성 없음 아닌가.

 

만남의 철학은 간단하지만 결코 만만치 않다. 나 자신이 주체성으로 서는 한편 다른 주체성과 끊임없이 만나면서 다른 차원의 주체성으로 거듭나는 지난한 과정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아집과 오만, 엘리티즘, 콤플렉스 따위 들어설 틈이 없다. 참된 희망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새해에도 만나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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