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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갑의 난독일기(難讀日記)] 개미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우리’는 모호합니다. 꼼꼼히 따져볼수록 복잡합니다. ‘나’와 ‘너’처럼 절대적일 수 없어서,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입니다. 수학교과서에 등장하는 집합 같다고나 할까요. 교집합이거나 합집합일 수 있는, 그러니까 ‘A∩B’ 혹은 ‘A∪B’인 것이 ‘우리’입니다. 겹쳐진 두 개의 동그라미에 표시된 빗금일 수도 있고, 중괄호 속에 나열된 원소일 수도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숫자나 기호로 표시된 ‘우리’는 생명이 없어서 어떻게 묶여도 상처받지 않습니다. 정작 쓰리고 아린 ‘우리’는 사람 사는 영역에 있습니다. SKY이든 강남이든 연봉이든 무엇이든, 끼리끼리 교집합으로 묶인 ‘우리’ 속에서 차별과 박탈의 상처가 자라납니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이 통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 시절을 호령하던 ‘우리’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패거리였습니다. 하늘의 별을 따서 계급장에 붙일 수도 있는 그들에게 불가능이란 없었습니다. 남진이 부른 노래처럼,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복집을’ 짓는 사건도 저질렀습니다. 시절은 바뀌었지만 세상을 주무르는 ‘우리’는 여전합니다. 여전한 힘과 권력의 ‘우리’는 여의도와 SKY에만 있지 않습니다. 눈에 도드라지지 않을 뿐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든 ‘우리’라는 권력은 있습니다. 직장에도 마을에도 단체나 모임에도 ‘우리’라는 권력은 어김없습니다. ‘밥’과 거리가 멀다는 문학이나 예술조차 ‘우리’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우리’는 모호합니다. 일부러 끼리끼리 모이는 것만 ‘우리’는 아닙니다. 권력의 별을 향해 함께 모의하는 ‘우리’만 있다면 세상은 너무나 명확합니다. 그들이 주인인 세상에서 진리는 힘입니다. 그들이 가진 힘은, 정보와 기회와 계급과 자리를 독식하는 거대한 아가리입니다. 블랙홀만큼이나 강력한 그 아가리를 세상 사람들은 ‘권력’이라 부릅니다. 옷과 집과 돈과 땅이 권력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은 너무도 빤한 상식입니다. 참 명확한 세상입니다. 그럼에도 모호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들 말고도 너무도 많은 ‘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라는 권력으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된 ‘우리’ 역시 ‘우리’인 것입니다.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우리’가 있습니다. 권력이 뭔지, 힘이 뭔지, 빽이 뭔지도 모르는 ‘우리’들로 넘쳐나는 세상입니다. 권력을 틀어쥔 자들은, 그런 ‘우리’를 가리켜 ‘생산자’ 혹은 ‘소비자’라고 정의합니다. 틀렸습니다. 생산과 소비에 필요한 자본은 그들에게 있지 ‘우리’에게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잉여와 증식을 위해 생산하고 소비하는 서민일 뿐입니다. 출근과 퇴근을 반복해야 간신히 먹고 살 수 있는 직장인일 뿐입니다. 끝없이 씨를 뿌리는 농민이거나, 쉼 없이 그물질 하는 어민일 뿐입니다. 가사노동에 지친 주부이거나, 은퇴한 노인이거나, 불편한 장애인일 뿐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시대 아이들은 예비서민인 셈입니다.

 

출퇴근길 지하철은 개미 소굴입니다. 끝없이 먹이를 물어 나르는 일개미들의 소굴. 여왕개미를 위해 일개미들은 죽을 때까지 일을 합니다. 지하철을 타고 출퇴근을 반복하는 ‘우리’도 일을 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여왕개미를 위해 일하다 죽을 생각이 없습니다. ‘우리’는 개미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권력과 상관없이, ‘우리’ 모두는 똑같은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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