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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종준의 경기여지승람(京畿輿地勝覽)] 84.명당(明堂)이라는 땅 잡기의 어려움

 

사람은 살아서 거주하는 집을 양택(陽宅)이라 하고, 세상을 뜬 후 영원히 안식할 곳을 음택(陰宅)이라 한다. 이 음택에도 신분에 따라 등급이 있어서 왕과 왕비의 무덤은 능(陵), 세자와 세자빈 그리고 왕이 된 아들은 낳은 후궁의 무덤은 원(園)이라 하고 그 밖에 왕자와 공주, 대군 등의 왕족 무덤은 묘(墓)라고 불렀다. 비록 임금이 되었으나 폐위된 연산군과 광해군의 무덤도 묘라고 부른다.

 

그런데 능·원·묘 모두 풍수지리를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일정한 판단 기준이 없다. 적어도 왕릉이라면 처음 자리 잡을 때 명당자리를 잡게 되지만, 후일에 좋은 자리가 아니라고 재평가돼서 천봉(遷奉, 능을 다른 곳으로 옮김)하는 경우가 여러 차례 있었다.

 

 

조선 제23대 순조(純祖)와 왕비 김씨의 능인 인릉(仁陵)도 파주 교하(交河)에 있다가 1856년(철종7)에 지금의 자리로 천봉하였다. 원래 그 자리에는 세종대왕의 영릉(英陵)이 있었는데, 장남이 일찍 죽고 장손이 다치는 불길한 자리라는 이유로 여주로 옮겨갔다. 최양선(崔揚善)의 주장대로 장남인 문종 임금이 일찍 죽고 장손인 단종도 숙부인 수양대군(세조)에 의해 임금 자리에서 밀려났을 뿐 아니라, 죽게 되었고, 세조의 장남인 의경세자도 일찍 세상을 뜬다.

 

 

인릉을 옮기려고 일을 시작할 때 영릉이 있던 곳을 살펴보니, 광중(壙中)은 석곽(石槨)을 썼고, 곽(槨) 안에는 왼쪽에 청룡, 오른쪽에 백호, 남쪽에 주작, 북쪽에 현무가 그려져 있었다. 화법이 신동(神動)하고 채색이 새것과 같았으며, 그 안에는 짐승의 뼈가 있었다. 대체로 고려 때의 풍속에는 버려진 능묘 속에다 소나 말의 뼈를 던져서 더럽히곤 했는데, 조선 초기의 일은 고려 말과 시대적 거리가 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본광(本壙)을 무너뜨리고 다시 만들었는데, 뜻있는 사람들이 이를 애석하게 여겼다.

 

 

인릉의 천봉에는 몹시 황당하고 참혹한 일이 있었다. 처음에 자리 잡은 교하가 좋은 자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능이 자리 잡을 곳의 흙빛이 검은색이라 흡족하지 못하고 능에 사용할 돌이 깨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곳을 능 자리로 선정한 상지관(相地官) 이시복(李時復)을 잡아다 가두도록 하라는 대비(大妃)의 명이 내렸는데, 대역죄인도 아닌데 불과 보름 만에 처형당한 것이다. 1835년 2월 30일 이시복(李時復)을 급히 참(斬)할 것을 청하니, 3월 15일에 참수하였다. 이시복은 관서 사람이며, 벼슬은 양덕 현감이었는데 풍수지리에 밝아서 출세하였다. 순조의 인릉을 조성하는 일에 모든 책임을 맡겼는데, 흙빛이 불길하다는 이유로 처형당한 것이다. 그 후 불법으로 사형 집행이 이루어졌다고 하여 다시 논의가 있었고, 단순한 참수형이 아니라 온몸이 난자당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안동김씨 세도정치(勢道政治)의 희생이 된 듯하다.

 

참수형 집행은 망나니들이 했는데, 아무리 죄가 있다고 해도 사람의 목을 베는 것은 정상인으로서는 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죄인들 중에서 망나니 일을 맡게 되지만, 정신적 스트레스가 많았고 술에 절어 살았던 것이다. 사극에 큰 칼을 들고 춤을 추면서 입에 머금은 술을 칼에 뿜고 목을 베는 장면은 정확하게 고증된 게 아니라 그들의 심리적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다.

 

[ 경기신문 = 김대성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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