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로써 정조 탄신 228주년이 된다. 우리는 정조시대를 역사상 유례없는 격변의 시기라고 말한다. 그도 그럴것이 임진왜란(1592-1597)과 병자호란(1636-1637)의 양란에서 벗어나 숙종대 이래 중흥을 이루면서 많은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이 시대에 등장하여 학문정치라는 차원 높은 대안으로 급격한 시대적 변화에 대처한 문신 가운데 한 사람이 안성 태생인 충문공(忠文公) 유언호(兪彦鎬)였다.
그는 생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비참한 죽음을 보고 상심한 정조가 즉위하자 규장각 초대 직제학으로 정조에 학문을 가르치면서 정조와 일체 군신의 사이가 된다. 그는 탕평정치를 통하여 유능한 관료와 학자들을 등용하고 이들을 거느려 정조시대의 안정적 변화를 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임금과 신하라는 입장차 때문에, 또는 사상과 인식의 차이 때문에 군왕과 갈등을 빚다 유배의 길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학문정치는 일정 기간이나마 꽃을 피울 수 있었고, 마침내는 진경문화(眞景文化)를 창출하는데 공헌했던 것이다.
유언호가 타계하자 정조는 충문공이란 시호를 내리고, “동료들 가운데 가장 앞섰고 칭찬을 받은 것도 끝내 변함이 없었으니 이 같은 사람을 어디서 다시 찾아 오겠는가. 이제는 죽었는지라 다시 볼 수 없게 되어 애석하고 불쌍한 마음에 오랫동안 말을 하지 못하였다.”라고 절절한 비감을 글로 남겼다.
당대의 대학자이다 보니 남긴 일화도 많다. 그가 개성유수로 있을 때 정치적으로 어려움에 처한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을 도와 ‘열하일기’를 남길 수 있게 한 것은 너무 유명하다. 또 그는 판중추부사로 있을 당시 정조가 축성한 화성(華城)의 4대 문 가운데 하나인 창룡문(蒼龍門)의 편액을 쓴 것도 수원과의 인연 가운데 하나라 할 것이다. 21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의 글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충문공의 역사적 인격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고도 남을 일이다.
이창식/주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