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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넘어선 근·현대 인문학의 보고... 망우리역사문화공원(4)

망우리와 구리는 한때 한 마을
망우리역사문화공원 이름 수차례 개명
한국내셔널트러스트 망우리공원 알림이 앞장
묘소엔 아름다운 우정을 담은 일화 가득
산림녹화에 이바지한 일본인 묘소 존재

망우리공원은 경기도 구리시와 서울시 중랑구를 경계하고 있다. 이곳에는 빼앗긴 나라를 되찾겠다는 독립운동가와 민초(民草)들이 실의에 빠졌을 때 문학과 예술로 그 슬픔을 달랬다. 이곳에는 근·현대의 내로라하는 선각자 80여 명을 포함해 6천 기 정도의 필부필부(匹夫匹婦)가 누워있다. 망우리공원은 그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역사적·철학적·예술적·교육적 가치를 지닌 근·현대 인문학적 보고이다. 3회에 걸쳐 망우리의 인문학적 가치와 독립운동가, 예술가 등을 소개했다. 이번엔 망우리공원의 비사와 비전을 살피는 ‘망우리에서의 사자후, 못다 한 이야기’를 구지옛생활연구소 한철수 소장과 질의응답으로 풀어본다.

 

 

 

Q: 망우리와 구리는 한때 한 마을이었다고 하는데

A: 경술국치 이후 조선총독부는 전국의 행정개편을 단행했다. 1912년에 착수해 1914년 4월 1일 완료했다. 구리시의 옛 이름은 구지면이었고 중랑구 망우 본동과 봉화산 주변이 망우리면이었다. 일제는 구지의 구와 망우리의 리를 합쳐 구리면으로 했다. 1963년 1월 1일 망우리면 지역이 서울로 편입되기 전까지 49년간 같은 면사무소를 사용했다.

 

 

Q: 망우리역사문화공원의 이름이 몇 번 바뀌었다고 하는데

A: 1933년 6월 10일 드디어 ‘망우리공동묘지’의 시대를 열었다. 이때 정식명칭은 경성부립망우리공동묘지였고, 해방 후 서울시립망우리공묘지로 바뀌었다. 1973년 망우리가 만장이 되자 공동묘지의 역할을 마친다. 1977년 망우묘지공원으로 바뀌었으나 망우리에 대한 역사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1998년 8월 13일 다시 망우리공원으로 다시 이름을 바꾼다. 1997년부터 다음 해까지 독립운동가와 문학인 등 15명 인사의 무덤 주변에 연보비를 세우고 사색의 공원(길)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2015년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선정됐고, 2016년 우리 인문학길-사잇길 2개 코스를 만들었다. 2022년 4월 1일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탈바꿈했다. 아쉬움이 있다면 조선 시대부터 부르던 망우리가 아닌 망우라는 이름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Q: 자료를 제공할 때 한국내셔널트러스트라는 단체가 자주 등장하던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A: 한국내셔널트러스트는 망우리공원을 널리 알린 단체이다. 2012년 이 단체에서 매년 선정하는 '꼭 지키고 싶은 문화유산'에 망우리공원이 선정된 후 공식적인 명칭은 아니지만 '망우리인문학공원' 혹은 '망우리사잇길'로 불렀다. 이 단체는 망우리위원회를 신설하고 본격적인 인문학연구에 들어갔다. 독립유공자의 무덤 8기를 발굴해 근대문화유산으로 등재하는데 주도했다. 무엇보다도 안창호 선생의 묘비를 옮긴 것은 큰 자랑이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실행한 무덤에서 배우는 청소년 인문학프로그램인 도전! 러닝맨을 3년간 유치했고, 지금도 인문학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또한, 중랑구의 용역을 통해 3차례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30분 안팎의 새로운 인물을 찾아냈다.

 

 

Q: 새로이 찾아낸 인물 가운데 특별히 소개하고 싶은 분은

A: 망우리공원에 남아있는 모든 이들이 소중하다. 제2대 중앙관상대장 국채표, 식물학자 장형두, 한영중고교를 설립한 박현식, 우리나라 초기 방송계를 이끈 노창성·이옥경 부부, 강남대 설립자 변성옥 등을 둘 수 있다. 장형두 교수는 우리나라 식물학 선구자로 1934년 경성식물회를 창립해 조선 향토식물을 조사해 7000 종이 넘는 표본을 연희전문에 기증했고, 현재 일본에 2177점이 남아있다. 1949년 학생식물도보(보통 식물 600종 수록)를 발간했으나, 좌익활동으로 인해 불행한 죽음을 맞았다. 독립운동가이자 여성경찰 출신 김분옥도 기억에 남는다. 중랑천의 어원이 된 조선초 변중량의 후손이자 한성판윤 출신 독립운동가 변원규 외에 김찬두·나우·이영학·허연·신명균·이탁·김기만·김명신 등 10여 명의 독립운동가 묘소도 기억의 노트에 담게 됐다.

 

 

 

 

 

Q; 아름다운 우정을 담은 일화를 남긴 분들이 있다고 하는데

A: 소파 방정환과 영주 최신복, 도산 안창호와 태허 유상규의 일화를 들 수 있다. 태허의 연보비에는 “도산의 우정을 그대로 배운 사람이 있었으니 그것은 유상규였다. 유상규는 상해에서 도산을 위해 도산의 아들 모양으로 헌신적으로 힘을 썼다”라고 적혀있다. 이는 둘의 관계가 부자지간으로 보일 정도로 각별했다. 도산과 태허가 상해에서 독립운동을 할 때 도산의 뜻에 따라 귀국, 의료계몽 운동에 전념하다가 1936년 감염과 과로로 쓰러진다. 때마침 출옥한 도산이 장례를 이끌었다. 2년 후 도산도 투옥 후유증으로 “유상규 군이 누워있는 그 곁 공동묘지에다가 묻어주오”라는 유언을 남기고 서거했다. 그리고 도산은 태허의 곁에 눕게 된다.

 

소파는 감시 나온 일본 순사도 울릴 정도로 동화구연의 대가였다. 수원 강연 때 최경우와 신복 부자도 그 자리에 있었다. 부자는 소파의 추종자가 되었고, 신복은 소파의 그림자로 산다. 소파가 서거하고, 홍제동 납골당에 있던 소파의 유골을 동료들과 소파를 망우리로 옮겼고, 그는 “존경하는 선배 소파의 밑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기고 타계한다. 그리고 소파의 무덤 아래 묻힌다. 지금도 본보기가 되는 우정과 의리이다.

 

 

 

Q: 망우리공원에는 일본인 묘역이 있던데, 특별한 인연이 있는지

A: 사이토 오토사쿠와 아사카와 다쿠미이다. 둘은 우리나라 산림녹화와 관련이 깊다. 구한말 한국을 찾은 외국인들의 눈에는 금수강산이 아닌 나무 한 그루 없는 민둥산으로 비쳤다. 사이토 오토사쿠는 조선총독부 산림과장으로 근무하면 들에는 미루나무를, 산에는 아까시나무를 심어 산하를 푸르게 한 사람이다. 그는 퇴임 후에도 한국에 남아 치산과 녹화라는 산림경영업무를 업으로 삼았다. 그는 임업 근대화와 녹화에 이바지했다는 평가와 산림 수탈의 지휘자라는 평가가 엇갈린다.

 

사이토 오토사쿠는 총독부 산림과 임업시험장에 근무하면서 잣나무 종자를 노천매장법으로 산림녹화에 힘쓰고, 한국의 소반과 도자기에 관한 책을 출판하였을 정도로 한국민예에 조예가 깊었다. 평소에 우리말을 하고 우리의 옷을 입었고, 오상순·염상섭·변영로 등 예술인과도 교우했다. 식목일을 준비하다가 급성폐렴으로 숨을 거두었다. 유족은 그에게 조선옷으로 수의를 입혔으며, 장례식에서 상여를 서로 메겠다는 이웃이 넘쳐 마을 이장이 순서를 정해 운구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진정한 한국의 친구이자 이웃이었다.

 

 

 

Q: 망우리공원 사잇길을 걷다가 보면 무리를 지어 묻힌 무덤이 있다. 그 사연은

A: 1936년 이태원에서 2만 8000명의 유해를 한꺼번에 옮겨온 이태원묘지무연고분묘합장묘가 있다. 이곳에 유관순 열사도 이곳에 합장된 것으로 추정돼 유관순 열사 추모의 공간이 되고 있다. 또한, 마포 노고산(서강대 뒷산)의 묘지도 택지개발로 인해 1938년 무연분묘를 망우리로 이장하고 경서노고산천골취장비를 세웠다. 망우리공원에는 개인, 가족묘도 있지만 알지 못하는 사람과 엉키어 묻힌 무덤도 있다. 이곳이 망우리공원이다.

 

사진·자료제공=한철수 구지옛생활연구소장

 

[ 경기신문 = 이화우·신소형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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