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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기의 말에게 말 걸기] 사라지지 않는 말

 

말은 사라진다. 반면에 글은 남는다. 말은 음성(소리)이어서 사라지고, 글은 문자(형태)이어서 남는다. 말이 존재하는 양식은 ‘사라짐의 양식’이고, 글이 존재하는 양식은 ‘보존됨의 양식’으로 구분되어왔다. 말은 사라지는 속성으로 인하여 그 존재성이 상대적으로 약하다. 즉 말은 해버리자마자 그 자리에서 금방 소멸한다는 현실 앞에 취약하다. 이것이 우리의 통념이었다.

 

말은 빅 히스토리(Big History) 차원에서 살펴봐야 할 정도로 오랜 연원을 가지고 있다. 유발 하라리가 말하는 ‘사피엔스’의 진화 중 첫 번째에 해당하는 인지 혁명도 사피엔스가 말을 사용할 수 있었으므로 가능했다. 두텁고 오랜 말의 역사에 비하면, 글의 역사는 보잘것없다. 그런데 말이 있어서 글이 태어났다는 점을 우리는 놓친다. 말의 역동이 최고조에 달함으로써, 글을 탄생시킨다. 문명사회에서 글은 말을 주변으로 밀쳐내고, 지식과 문화를 거머쥐는 권력의 자리에 임한다. 말은 낮은 백성들의 세상 언저리를 지킬 뿐이었다.

 

말이 지니는 존재성의 취약함, 즉 말은 현실에서 금방 소멸한다는 점은 생각해 보면 숨은 함의가 많다. 이는 말의 위상을 거룩하게 만들기도 하고, 속되게 만들기도 한다. 유일신 종교에서 신의 존재는 대개 목소리로 현신한다. 모세가 유대 백성을 이끌고 이집트를 탈출하면서, 시나이(Sinai)반도의 산에서 본 야훼는 음성으로 마주친 신이었다. 신이 문서로 말씀을 내려 주셨다는 이야기는 왠지 신성(神性)을 훼손하는 것 같다. 신의 음성을 들었다는 사람은 있어도, 신의 얼굴을 보았다는 사람은 없다.

 

말의 즉시 소멸성은 말의 쓰임을 속되게 만든다. 여기서 이 말을 하고, 저기 가서 저 말을 하는 것이라든지, 말로 한 약속은 쉽게 둘러 엎는다든지, 거짓말을 또 다른 거짓말로 땜질하는 것이라든지, 내가 한 막말 욕설은 돌아보지 않고 남이 한 실언은 한사코 할퀴고 든다든지 등등이 다 말의 취약성에 올라타서 사람들을 속이는 작태이다. 내가 한 말을 누가 외우겠나. 따지고 들면, 잡아떼면 그만이지. 선거판에서 흔히 보는 장면이다. ‘선량(選良)’ 후보들이라는데, ‘선불랑(選不良)’ 후보란 말이 더 맞겠다. 학교가 아이들을 잘 가르쳐 놓으면 뭣 하나, 저런 말에 물들까 무섭다고도 선생님들은 말한다. 말은 바로 소멸해 버리고 만다는 통념이 사람들을 이렇듯 말로써 삿(邪)되게 한다.

 

그러나 문명사의 변전은 묘한 것이다. 글(문자)의 기세에 밀려났던 말은, 바로 그 문자 문화의 힘으로 취약성을 극복했다. 문자를 능가하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잘 아는 대로, 인류는 문자 혁명으로 눈부시게 지식과 기술을 발전시켰다. 오늘날 디지털 기술과 AI 지식 혁명에 이른 것도 인류의 문자(글)사용 기반이 만들어 낸 것이다. 그 성과로 이제는 어떤 구어(말)도 문자 이상의 강한 보존성을 갖게 되었다. 어떤 말(口語)도 오디오 파일로 담아서 보전되고, 어떤 발화(發話) 상황도 영상 파일로 기록된다. 말은 즉시 사라진다는 통념은 수정되어야 한다. 기록성과 보존성만 확보된 것이 아니다. 강한 소통성, 빠른 전파력까지 갖추었다. 이 변화가 너무 빨라서 기성세대는 이를 이해하면서도 실재하는 현실(reality)로는 얼른 체득하지 못한다.

 

이전에 했던 막말로, 어디선가 분별없이 내뱉었던 욕설의 말로, 그때만 모면하기 위해서 했던 모순의 말도, 내 이익에 급급해서 했던 거짓말도 모두 불려 나온다. 내가 했던 말들, 사라진 줄 알고 있었는데, 사라지지 않았다. 영상으로 담겨 있었고, 녹취 파일로 숨어 있었다. 그래서 선거 후보자들이 사과하고 사퇴하고, 취소하고 번복하는 일들이 줄을 잇는다.

 

지금은 ‘사라지지 않는 말의 시대’이다. 말은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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