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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 통감 데라우찌마사다께(寺內正毅)가 조선의 통치권을 일본 천황에게 넘겨 주는 매국 문서인 ‘한일합방조약’을 체결한지 95년이 된다. 일본은 7일 동안 국내 동향을 살피고 나서 1910년 8월 29일 조약을 공포했다. 이날의 조약 공포와 함께 519년 동안 연면하게 이어져 왔던 조선은 역사 무대에서 사라졌고, 조약 체결 당시 ‘대한제국’이던 국호도 예전의 ‘조선’으로 바뀌고 말았다.
10월 1일 초대 조선총독으로 임명된 데라우찌는 곧바로 무단통치(武斷統治)를 시작했다. 무단통치를 감행한 데라우찌는 “조선인은 일본 법규에 복종하든지 죽든지 하나를 선택해야한다.”고 했고, 당시 일본 군부를 대변하던 마쯔시다호난(松下芳男)은 “일본의 헌병 감시망은 개미 새끼 한마리도 기어 나갈 틈이 없다.”라며 일본 헌병을 치켜 세웠다.
무단정치는 가혹했다. 경찰서장과 헌병대장에겐 즉결 처분권이 쥐어지고, 조선인을 수사할 때 부녀자 강간은 예사였다. 고문도 아무 제약이 없었다. 그래서 당시 민가에서는 아이가 울 때 “호랑이 온다”가 “헌병이 온다”로 바뀔 정도였다. 노역은 아무 때나 이루어지고, 개인 소유 땅은 보상없이 수용됐다. 법과 규정 운영도 저들 멋대로였다. 일본인과 조선인 간에 소송이 제기되면 무조건 일본인이 이겼다. 교육차별도 심했다. 조선인을 위한 고등교육기관은 크게 부족했고, 민족성이 농후한 사립학교 탄압은 엄청났다.
합방 이후 두 달 사이에 100여개의 사립학교가 폐교되고, 1910년에 8만 여명이던 학생은 1919년에 3만 8천여명으로 5만 명이나 줄었다. 1919년 3월 1일 마침내 3·1운동이 일어났다. 조선총독부는 3·1운동이 있고나서 무단통치 대신 유화정치를 시작했지만 식민지 폭정은 껍데기만 달랐을 뿐 알맹이는 여전했었다. 1910년 8월 29일. 국치일(國恥日)이라 하기엔 너무 아픈 날이다.
이창식/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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