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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협심이 강한 선비를 협객(俠客)이라고 한다. 문(文)과 무(武)로 나누면 무에 속한다. 어느 나라에나 협객은 있고, 우리나라에도 협객은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백동수(白東修)다. 백동수는 스물아홉때 무과에 급제하고, 마흔다섯에 국왕 호위부대인 장용영(壯勇營) 초관에 임명돼 정조의 명을 받아 이덕무, 박제가와 함께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편찬했다. 그리고 훗날 비인현감과 박천군수로 재직하다 들사람이란 뜻의 그의 아호 ‘야뇌’처럼 권력에 연연하지 않고 순수 자연인으로 살았다는 것이 생애의 대강이다.
그가 남긴 ‘무예도보통지’는 오늘날 남아있는 조선의 무혼(武魂)이 담긴 유일무이한 전통무예 교본이다. 그러나 그토록 귀중 도서를 남겨 전통무예의 맥을 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백동수는 역사 기록면에서 철저히 소외당하고 말았다. 문을 승상하고 무를 천시한 편협한 역사 기록의 결과다.
백동수는 시와 서도에도 능했다. 박제가는 “경서(史記)를 능히 논할만 하다.”했고, 성대종은 “무로써 문을 이룬 사람이다.”라고 평했으며 당대의 문호 박지원은 “전서와 예서에 뛰어나다.”고 했다. 또 이덕무는 자신이 쓴 글에 평을 부탁할 정도였고, 김홍도와는 화법에 대해 토론을 벌였다니 그의 지식세계의 폭과 깊이를 짐작할 만하다.
백동수는 18기군을 가르칠 때 “바람으로 머리 빗고, 비로 목욕하고, 찬바람을 쓰다듬고, 폭염을 섭취하라.”며 부하들을 독려했다고 한다. 협객 백동수의 발자취를 재현한 이는 24무예연구소장 김영호씨다. 그는 백동수의 무예사 발굴과 재구성을 위해 막노동까지 해가며 24반 무예를 익혔다니 ‘무예 전도사’라 할만하다. 언젠가 쟁이골(대표 김영숙)에서 무예 시범을 보고 압도 당한 적이 있었는데 최근엔 사단법인 무예24기보존회(이사장 우제찬)까지 설립되었으니, 200년만의 백동수 재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창식/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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