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사법부의 수장을 지낸 85세의 유태흥 전 대법원장이 한강에 투신, 세상을 놀라게 했다. 사회적으로 누릴 것을 다 누려 본 원로가 왜 그런 식으로 죽음을 택했을까 여서다. 편편히 밝혀진 것은 병에 의한 고통이 심해 비관 자살이 아닌가 하는 것이 전부다.
우리 사회에 자살이 꽤 늘고 있으나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덮어지기 일쑤다. 지난 해 10월 서울 오류동의 한 아파트에서는 92세의 허모 할아버지 부부가 목을 매 충격을 주었다. 허모 할아버지는 치매에 걸린 93세의 할머니를 돌보다 더 이상 치료비를 구할 수 없어 자살을 택한 것이다. 허할아버지는 살기 어려운 아들에게 짐이 되기 싫어 떠난다며 200만원의 장례비를 남겼다.
유태흥 전 대법원장의 자살로 죽음 특히 노인의 죽음에 대해 회자되고 있다. 죽음이라는 것이 사고사가 아니면 대개가 노년기를 맞아 오게 마련인데 문제는 불가항력적이라는 것이다. 소위 수(壽)한다고 해서 자연사에 이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자연사도 그 속을 보면 병사가 주류를 이르고 있다.
죽음에 이르는 동안 병에 의한 고통과 노경에 찾아오는 외로움, 생활고 등 겪어야 할 아픔의 터널이 너무나 긴 것이다. 죽음에 연착륙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한 이유다.
사회는 고령화 된다면서 이 부분에 대한 배려가 미약하다. 노인들을 자살로 모는 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 사회의 책임이다.
뒤늦게나마 정부에서 노인 등의 임종에 관심을 가져 다행이다. 정부는 올해 안에 말기환자들이 죽음을 편히 맞게 하기 위한 호스피스제(制)를 법제화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고통 없는 임종이 되도록 도와주는 것은 시대적 요청이다. 한 발 더 나가 안락사 문제도 토론할 때가 되었다. 종교적인 문제의 극복을 시도할 때가 되었다. 품위 있게 죽을 권리가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