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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농담] 기계신과 돌봄의 정치학

 

땡볕이 내리쬐는 한낮의 버스 정류장에 다섯 살쯤 된 어린이가 두 손 포개 기도하고 있었다. 어린이는 동생 그리고 어머니와 외출 중이었다. 어머니는 두 아들과 한여름 도로 위를 방황하고 있었는데, 어린 둘째는 더위와 피로에 지쳤는지 유아차에서 노곤히 자고 있었다. 어머니는 택시를 잡으려 시도했다. 하지만 택시는 흔드는 손에 멀찍이서 다가오다 이내 가속 페달을 밟아 신속히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어머니는 유아차가 있으면 택시를 잡을 수가 없다고 한탄했다. 아스팔트 도로가 지글지글 끓었다. 그렇게 택시를 몇 대 보냈다. 정말이지 지독한 여름이었다.

 

한탄을 외면할 수 없었던 큰아들은 어머니를 위로하고 싶었다. “그럼, 버스 타고 가자 엄마.” 어머니는 유아차가 있으면 버스 기사분들도 좋아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하는 수 없이 집까지 걸어가 볼까 하며 발걸음을 떼보려 했지만, 엄두가 나지 않는다. 다섯 살 어린이의 기도는 이때 시작되었다. “우리 버스 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어머니는 그 모습이 귀여워 미풍이라도 분 듯 웃으며 힘을 내어 집으로 걸어가자 하였다.

 

어린이의 기도를 들었을 신은 (그가 누구이든) 분명 인간 세상을 가엾게 여겼을 것이다. 우습게도 나는 그 순간 어떤 기계신을 상상했다. 택시도 버스도 모두 자율주행 상태였다면 승차 거부는 없었을 텐데 하는 생각. 유아차가 타고 내리는 기다림의 시간, 좁아진 공간, 유아차에 지저분해진 자동차 시트를 닦는 것을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인간에 비해 기계는 훨씬 강하고 인자하지 않을까. 그렇게 인간의 위치를 하나씩 기계로 대체하는 상상을 했다. 잘 개발된 기계가 어린이의 귀가뿐만 아니라 안전, 건강, 학습 모든 돌봄을 도맡는 게 차라리 낫지 않을까.

 

우리 세상은 정말 어린이의 기도하는 손끝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는 형국인 걸까. 언제부터 승차 거부는 어린이가 기도로 간구해야 하는 문제가 되었나. 승차 거부뿐이랴. 여름은 영원할 듯 밤낮없이 무덥고, 피해 규모조차 정확히 헤아릴 수 없는 수의 10대 청소년들이 ‘재미로’ 만든 딥페이크 성착취물의 대상이 되었다. 우리는 정녕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줄 몰랐다고 할 수 있나. 낮은 출생률의 원인을 명쾌히 설명할 능력이 내게는 없지만, 한 가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이런 돌봄 환경 속에서 아이를 키울 용기를 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라는 사실이다.

 

기술 관련 칼럼을 쓰며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삭막한 어른인 나는 기도의 순간 기계신을 불러냈지만, 이는 허깨비다. 공동체에 돌보려는 마음이 없는데 기계가 그런 마음을 가질 리 만무하다. 이는 기술력의 문제가 아니다. 돌봄에 탁월한 기계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해도, 돌볼 여유가 없는 사회에서 기계가 돌봄에 힘쓸 리 없다. 돌봄은 돌봄이 필요한 자를 위해 자원을 쓰는 공동체의 문제이며, 따라서 정치적이다. 우리의 정치가 돌봄을 우선하지 않는 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계신은 없다.

 

다섯 살 남짓한 어린이는 분명 기계신이 아닌 다른 어떤 존재를 상상하며 기도했을 것이다. 그의 기도가 마음 쓰이는 까닭은 이 기도에 응해야 하는 게 바로 우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것은 기술이 아닌, 서로를 돌보는 환대와 책임의 공동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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