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석열 대통령이 사실상 2선으로 물러나고, 정치권의 탄핵 대치가 장기화되면서 정부가 주도해 왔던 각종 경제정책들이 동력을 잃었다. 이에 따라 반도체 특별법 등 주요 경제법안 및 밸류업(Value-up·기업가치 제고)' 등 정부가 앞장섰던 정책들이 무산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예금자보호한도 상향 등 여야가 합의를 이룬 민생법안들도 좌초될 위기에 놓였다.
특히 비상계엄 사태 이후 내년도 예산안을 둘러싼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헌정사상 최초로 '준예산' 집행이 현실화될 것이라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8일 관계부처에 따르면 정부와 여당이 추진하던 반도체산업 경쟁력 강화 특별법은 탄핵 정국 속 여야 대치로 처리가 불투명해졌다. 해당 법안의 핵심은 반도체 기업의 주 52시간 근무제 예외와 보조금 지원 등으로, 여야가 합의를 이룰 가능성이 낮아졌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반도체 기업의 통합 투자세액 공제율을 현행보다 5%포인트(p) 상향하고, 국가전략기술 투자세액공제 대상에 연구·개발(R&D) 시설 투자를 포함하는 정부 지원책도 뒷전으로 밀릴 가능성이 커졌다. 대규모 전력을 쓰는 인공지능(AI)·반도체 산업 등을 지원하기 위해 국가전력망 확충 시 인허가 절차를 간소화하는 내용의 전력망 확충 특별법(전력망법)도 현재로서는 논의 재개 시점을 예상하기 힘들다.
이 밖에도 최고세율 인하 등 내용을 담은 상속세제 개편안, 정산 주기 단축을 골자로 하는 대규모유통업법 개정안,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 납입 한도 상향 등 내용을 담은 조세특례법 개정안 등 법안들도 국회 문턱을 넘기기 어려운 상황이다.
정부가 주도적으로 추진해왔던 '밸류업' 정책도 추가 동력을 상실했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이복현 금융감독원장 모두관련 조치들을 차질 없이 진행하겠다고 강조했지만, 주주환원 증가액 법인세의 5% 세액공제, 배당 증가액의 저율 분리과세, 상속세 관련 최대 주주 할증평가 폐지 등 정작 입법이 필요한 핵심 과제들은 미뤄질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예금자보호한도 상향, 대부업법 개정, 실손보험 개혁 등 여야가 합의를 이룬 민생관련 금융정책도 표류할 전망이다. 정무위 전체회의를 통과한 이후 본회의만 남겨두고 있는 상황이지만, 탄핵 논의가 모든 의제를 집어삼키면서 논의 일정은 불투명해졌다.
국회 법사위 소속 한 의원실 관계자는 “민생 법안 통과 관련해 현재 논의된 바는 없다”며 “금융 법안을 논의할 다음 주 법사위 회의도 예정대로 진행할지 불투명하며 일부 금융 법안 심사는 후순위로 밀릴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여야의 대치가 극한으로 치달으면서 내년도 예산안 통과도 난관에 봉착했다. 앞서 야당은 지난 2일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정부안에서 4조 1000억 원을 감액한 예산안을 강행 처리했다.
우원식 국회의장이 본회의 상정을 미루며 오는 10일까지 예산안에 대해 합의해달라고 요청했으나 비상계엄 사태 이후 정국 급변으로 논의는 무기한 중단된 사태다. 특히 윤 대통령이 비상계엄령 선포의 이유로 야당의 '예산 폭거'를 지목한 만큼, 합의점을 찾는 것이 더욱 어려워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에 따라 사상 초유의 '준예산' 편성 가능성도 거론되고 있다. 헌법 제54조 3항은 새 회계연도 개시 전까지 예산안이 의결되지 못할 경우 ▲국가기관의 유지 및 운영 ▲법률상 지출의무 이행 ▲이미 예산으로 승인한 사업의 계속 등을 위해 예산을 전년에 준해 집행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준예산이 편성되면 정부기능 유지에 필수적인 최소 예산만 집행할 수 있어 상당수의 복지 재원 지출이나 재량 지출 등에는 제약이 따른다. 여야 모두 이를 피하겠다는 입장이지만, 정국 혼란이 장기화할 경우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8일 대국민 담화에서 "비상시에도 국정이 정상적으로 운영되기 위해서는 정부가 제출한 예산안과 그 부수 법안의 통과가 무엇보다 필요하다"며 "각 부처가 제때 집행을 준비해야만 민생경제를 적기에 회복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 경기신문 = 고현솔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