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를 가도 꽃이다. 나무 아래 가난한 자, 노숙자, 제복 입은 자, 유모차, 개모차, 삼삼오오 여인들이 셔터를 누르느라 바쁘다. 높낮이 없이 모두 즐기고 있는 꽃 페스티벌이다. 빛이 조절하는 꽃들의 표정은 천변만화다.
마당 귀퉁이 텃밭에 상추도 혀를 내밀었다. 올해도 호두나무 밑엔 싹이 나지 않는다. 이사 오던 해 주인집 할머니에게 응달진 땅을 조금 얻어 씨를 뿌렸었다. 상추 싹이 드문드문 났다. 어느 날 할머니가 마당에서 햇살을 받으며 솎은 상추를 다듬고 있었다. 나는 텃밭을 보며 말했다. “어째 내 밭은 원형 탈모 걸렸을까요?” “세 든 사람이 그 정도면 됐지” 순간 돌아온 할매의 말이 섭섭해, ‘세입자는 볕도 월세만큼 쫴야 한다고요?’ 나는 평상에 앉아 털을 핥고 있는 고양이를 보고 ‘꽃님아, 세가 27만 원이니 오늘 9천 원 치 다 쬔 거 같다. 들어가자’ 잠시 후, 할머니는 호두나무 그림자를 밟으며 양푼에 삼겹살 세 줄, 믹스커피 두 봉지를 담아왔다. ‘꽃님아, 볕 더 쬐도 될 거 같다.’ 나는 삐진 마음이 봄 눈 녹듯 사라졌다.
한 번은 봄바람에 홀려 절 근처로 나들이를 갔었다. 아직 손이 타지 않은 냉이가 있었다. 뾰족한 돌을 주워 냉이를 한 움큼 깼을까, 젊은 스님이 절 마당에서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밭에서 나오라고 했다. 냉이만 캐고 갈 것이라고 했는데 보살이 쫓아왔다. 하는 수없이 옆 밭으로 옮겨 냉이를 캤다. 보살이 또 쫓아왔다. ‘무주공산에서 자란 냉이가 주인이 어디 있당가요?’ 항의했지만 소용없었다. 하늘도 물도 길도 소유권이 있다는 것을 익히 알았지만, 냉이의 주인이 있다는 것을 상상도 못했다. 차라리 시장에 가서 돈 주고 살 걸, 몇천 원어치 싸움만 하고 빈손으로 내려왔다. 니 것 내 것의 경계는 어디까지일까.
저녁을 먹고 티브이를 켰다. 청년들에게 집값을 묻는 인터뷰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들은 채광에 따라 방값 차이가 엄청나다고 했다. 서울에서 방을 구하려 다닐 때가 생각났다. 광진구 어느 이층집이었다. 주인을 따라 집 뒤로 빙 돌아가 허리를 굽히고 계단 서너 개를 딛고 내려갔다. 고개를 내밀다가 깜짝 놀랐다. 창문도 없고 장성이 누우면 발은 벽에 닿고 겨우 돌아누울 정도였다. 음지 식물을 키우는 곳도 아니고 문이 닫히자 관처럼 답답했다. 그날 밤 나는 친구 집에서 빗소리를 따라 밤새 뒤척였다. 그곳에 자는 사람은 누구일까. 봄날 새순 돋듯 꿈을 꾸는 청년일까. 아니면, 무너진 집을 일으키러 노동판을 전전하는 한집의 가장일까. 밥은 먹고 다닐까. 잠시 생각에 잠겼을 때 인터뷰를 하던 한 직장인은 이제 고향으로 내려갈 것이라고 말했다. 햇빛도 그들의 등을 떠밀었다.
빛이 언제부터 돈이 되었을까. 아이러니한 것은 집이 없는 자는 볕을 팔 수 없다는 것이다. 채광권은 동짓날을 기준으로 오전 8시부터 오후 4시 사이에 연속 4시간 이상 또는 오전 8시부터 오후 3시까지 2시간 이상 연속 빛을 받지 못할 경우에 발생한다. 그렇다고 치면 눈이나 비가 와 볕을 가리거나, 장마가 길어지면 월세에서 그만큼 빼주나? 햇살마저 돈 주고 사야 하는 세상이라니. 포장된 햇살을 택배로 받을 날이 머지않은 것 같다. 숨을 쉬면 돈이 든다더니. 봄 햇살이 강하게 눈을 찌른다. 앞이 캄캄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