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05.30 (금)

  • 구름많음동두천 17.6℃
  • 맑음강릉 20.3℃
  • 구름많음서울 18.2℃
  • 맑음대전 18.5℃
  • 맑음대구 19.0℃
  • 맑음울산 20.0℃
  • 맑음광주 18.4℃
  • 맑음부산 19.1℃
  • 맑음고창 18.4℃
  • 맑음제주 21.3℃
  • 구름많음강화 15.3℃
  • 구름조금보은 17.3℃
  • 맑음금산 18.1℃
  • 맑음강진군 18.7℃
  • 구름조금경주시 20.7℃
  • 맑음거제 19.7℃
기상청 제공

[정조의 원행을묘 백리길] 정조, 창덕궁-과천-화성행궁을 하루 만에 돌파하다

 

정조는 1789년 10월 11일 수원의 옛읍치에 현륭원을 조성했고, 1790년 2월 8일에는 현륭원을 처음으로 참배하기 위해 창덕궁을 출발했다. 그리고는 동쪽의 흥인지문으로 나가 말을 타고 뜬다리(浮橋)를 건너 과천 관아에 이르렀고, 다시 출발하여 사그내(沙斤川)에서 잠시 휴식 후 수원 관아에 이르러 밤을 보냈다. 이때 한강을 건넌 나루는 사람들이 수원을 오갈 때 일반적으로 건너던 동재기나루도, 새로 선택한 노들나루도 아니었다. 문헌 기록에 나루의 이름이 나오지는 않으나 동쪽을 향하는 흥인지문으로 나갔다고 하니, 사도세자의 관을 영우원에서 현륭원으로 옮길 때 뜬다리를 만들어 건넜던 뚝섬나루인 것 같다.

 

1790년 7월 1일, 정조는 배다리 제작의 다양한 내용을 담은 규정집인 '주교지남'을 신하들에게 공표했다. 이때 배다리(舟橋)를 만들 곳으로 노들나루를 최종 선택했고, 배다리 설치를 담당할 관청인 주교사(舟橋司)도 신설하여 노들나루에 설치하기로 했다. 그 결과 1791년 1월 16일, 1792년 1월 24일, 1793년 1월 12일의 현륭원 참배 때는 창덕궁-숭례문-노들나루(배다리)-남태령-과천을 거쳐 수원의 화성행궁에 도착했다. 1794년 1월 12일에는 오후 3시에 창덕궁을 출발했고, 노들나루(배다리)-남태령을 거쳐 과천행궁에 도착하여 밤을 보냈고, 다음 날 첫닭이 울자 출발하여 사근행궁에서 잠시 휴식 후 수원의 화성행궁에 도착했다. 이때 날이 아직 밝지 않았는데, 그날 현륭원 참배까지 다 끝내기 위해 서두른 것이다.

 

1794년까지만 해도 정조의 현륭원 행차는 뚝섬나루를 건너든 노들나루를 건너든 과천길을 통해 오갔다. 당시 수도 서울과 수원을 오가는 모든 사람들이 동재기나루를 건너고 남태령을 넘어 과천-지지대고개-수원을 거치는 최단코스의 과천길을 통해 다녔기 때문에 다른 길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동재기나루가 아니라 뚝섬나루와 노들나루를 건너면 우회하는 것이기에 얼마간 더 멀 수밖에 없다. 그래도 정조의 행차는 그 길을 하루 만에 돌파했고, 그때는 별로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춘향전에는 과거급제한 이도령이 암행어사가 되어 전라도의 남원을 향해 지나갔던 서울-수원 구간이 이렇게 서술되어 있다.

 

“부모님께 하직하고 전라도로 갈 때 남대문 밖 썩 나서서 서리, 중방, 역졸 등을 거느리고 청파역 말 잡아타고 칠패 팔패 배다리 얼른 넘어 밥전거리 지나 동적이(나루)를 얼른 건너 남태령을 넘어 과천읍에 중와(점심) 하고 사그내 미륵댕이 수원 숙소(숙박) 하고 대함괴(대황교) 떡전거리 진개울 중밋 진위읍에 중와(점심) 하고…(하략)”

 

당연한 것이지만 암행어사 이도령은 정조의 현륭원 행차 때 배다리를 놓아 건너던 노들나루가 아니라 서울-수원의 최단코스에 있던 동적이, 즉 동재기나루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넜다. 그리고는 정조 임금처럼 남태령을 넘어 과천읍(내)에서 점심을 먹었고, 사그내(사근행궁)와 미륵댕이(지지대고개)를 지나 수원(읍내)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묵었다. 이때 수원읍내는 대함괴(대황교) 가기 전에 기록되었으니 수원의 옛읍치가 아니라 팔달산 아래의 새읍치였다. 정조만이 아니라 이도령도 서울-수원을 하루 만에 돌파했다. 물론 현대인에겐 쉽지 않은 일이다.







배너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