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재명 후보는 투표일을 이틀 앞둔 지난 6월 1일, 한 유투브 방송(스픽스)에 출연하여, 초등학교 마치고 공장에 취직해야만 했던, 얼마 후 산재로 장애를 입어야 했던, 그러고도 ‘공돌이’ 신세를 면치 못했던 그 소년을 만나면 제일 먼저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 묻는 앵커의 질문에 울컥하고 눈시울을 붉히면서, “꼭안아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 순간, 착하고 다정한 민초들 모두 울컥했다.

“그 꼬맹이를 공장에 데려다 주려고 이끌어 가시던 어머니 얼마나 마음이 얼마나 아프셨겠어요. 나이 들어 지금 그날을 생각하면 내 마음이 더 아파요. 공장으로 가는 출근길, 등교하는 학생들을 마주치면 마음이 무척 힘들었습니다.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그들의 교복이 부러웠고 내가 입은 회색 작업복이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졌죠. 특히 같은 또래의 여학생들을 마주치면 어디든 숨고 싶었습니다.”
어떤 면으로 보면, 교복은 개성과 자율성을 억압하고 창의성을 훼방하는 상징이기도 하다. 군복과 ‘4촌’이다. 집단을 관리하는 대표적인 통제기술이 유니폼을 입히는 것이다. 독재자 전두환이 교복 자율화를 선언한 것(1983년)은 일종의 술수였다. 그러나 그 정치적 효과는 작지 않았다. 부작용이 뒤따랐다. 그 자율은 빈부격차를 현저하게 드러내는 폭력이었다. 바로 그 교복 대신 작업복을 착용한 이 소년공에게는 부러움 이전에 최하층 도시빈민의 신분증이고 목에 건 붉은 표찰이었다. 무쇠로 만든 굴레였다. 무겁고 끔찍했을 것이다.

그는 중고등학교 6년 과정의 졸업자격을 검정고시로 획득했다. 중졸자격은 1978년에, 고졸자격은 1979년에 갖게 된 것이다. 1년 3개월 걸렸다. ‘주경야독’(晝耕夜讀)은 중국 고대로부터 2000년 넘게 이어져 내려온 편모슬하의 머리 좋고 성실하고 효성 지극한 가난한 집 아들들이 세상으로 나가는 외길이었다. 같은 한자 문화권이었던 조선으로 넘어와 우리는 2000년만에 마침내 이재명 같은 혁혁한 성공사례를 갖게 되었다. 낮에 일하고 밤에는 책을 본 소년에게는 ‘주노야독’(晝勞夜讀)이 맞겠다.
아들은 가장 먼저 아버지에게 검정고시 합격증을 드렸다. 소년은 퇴근 후 충격적인 장면 앞에서 분노했다. 아버지가 그 눈물겨운 합격증을 찢어버렸던 것이다. 드물게도 당시에 대학교육까지 받았던 극빈가족의 가장으로서, 공부는 가족을 더 힘들게 만드는 짓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아들이 대학에 들어가는데 아버지가 훼방꾼 노릇을 하는 희귀한 가족이었다. 훗날 아버지가 세상 떠나고 부모가 된 뒤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했다. 이재명은 대학입학식에 교복을 입고 참석했다. 유일한 학생이었다.

“63년 전, 이 땅에 한 특별한 아들이 태어났다. 소년은 집채만한 바위를 지고 하루에 백두산을 열번씩 오르내렸다. 그의 인생은 험산준령(險山峻嶺)을 쉬지 않고 뛰어야만 하는 신산고초(辛酸苦楚)의 시간이었다.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신화가 아니고 현실이었다. 조용한 바다는 유능한 선장을 만들지 못한다.”
나는 그에게 표를 주고 한 표라도 더 모으기 위하여 이 글을 대중 앞에 남겼다. 그가 대한민국 21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 특별한 인생에 감동하고 공감하여 한 표를 던진 지지자들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기를 빈다. 그간 우리들의 다정하고 확신에 찬 동지로서의 지지는 너무 자주 아프게 배신당했다.